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33)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베델은 영국 신문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조선에 들어온 직후 통역 겸 번역자로 궁정의 영어와 일어 번역관이던 양기탁을 소개받았다. 두 사람은 같은 또래였기에 친구가 돼 우정을 나눴고, 양기탁은 추후 대한매일신보의 제작에 참여한다.

베델이 설립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에 반대하는 왕실과 민간 유지들이 은밀하게 투자했는데, 궁정의 번역관이었던 양기탁이 베델의 통역으로 가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의 총무를 맡아서 운영에 참여했다.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서구인들은 고작 100여명에 지나지 않았기에 영자신문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일본 통감부가 발행하는 영자지 <The Seoul Press>는 일본의 선전도구로서 정책적으로 발행된 것이었고, 베델이 발행한 대한매일신보의 영문판인 <Korea Daily News>도 일본과의 언론전을 위해 조선 왕실과 유지들의 정책적인 후원이 있었기에 발행이 가능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는 기사를 지속적으로 보도하며 일본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될 당시에는 일본이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 규모로 커져서 반일 민족으로 확대되고 있던 시기였다.

50년간 황무지를 개간하고 이용할 권리를 갖고, 그 이후에도 사용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는, 당시 전 국토의 3분의 2 정도 넓이였던 황무지에 일본인을 이주시켜서 한반도의 토지를 점령하겠다는 노골적인 침략 야욕이었다.

대한매일신보.(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매일신보.(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4일 만인 1904년 7월 22일자 독자투고란에 ‘황무지 개간 계획’이라는 윤치호의 글을 게재해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판했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동맹관계로, 영국인 베델이 대한매일신보 사장으로 일본에 비판적인 기사를 지속적으로 게재하자 베델을 추방하거나 신문을 폐간시키게 영국 정부에 강력하고 끈질기게 압력을 넣었다. 그 결과 베델은 두 번이나 재판을 받는 고초를 겪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대한매일신문은 관련 보도를 계속하며 일본의 부당한 주권침탈행위를 비판했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 논설로 체포되고 신문이 정간되자, 그 후속보도를 대한매일신보가 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장지연의 구속 소식을 보도하면서, “실로 대한 전국 사회신민의 대표가 되어 광명 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하리로다. 오호라 황성기자의 붓은 가히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빛을 서로 다투리로다”는 기사로 장지연의 용기를 찬양했다. 황성신문 정간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기사도 계속 내보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대한매일신보의 보도가 계속되자 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영자신문인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도 시일야방성대곡의 전문을 기사화했고 다른 서방 언론들도 관련 기사를 보도했다.

또한, 을사늑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고종의 밀서 관련 보도를 꾸준히 게재해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보도가 ‘을사늑약은 한일 양국이 자발적으로 체결한 것’이라고 주장하던 일본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특히 대한매일신보가 밀서의 사진을 전면에 배치해 크게 보도한 것은 고종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 반향이 매우 컸다.

대한매일신보는 전국 각지의 항일 의병들의 활동을 보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항일운동의 본거지 역할도 했는데,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의 본부 역할을 했고 국채보상운동의 의연금을 거두는 역할도 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베델의 신문을 열광적으로 지지했고 왕실도 비밀리에 자금을 제공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1907년 9월경에 대한매일신보의 발행부수는 1만부를 넘겼는데, 이것은 당시 한국에서 발행되던 다른 신문들의 전체 부수를 합친 것의 두 배가 넘는 발행부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파급력이 커지고 침략 계획에 큰 걸림돌이 됐기에, 일본은 베델을 추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영국을 압박했다. 일본의 요구가 끈질기게 계속되자, 결국 영국은 베델을 재판에 회부했다.

첫 번째 재판은 약식 재판으로, 1907년 10월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주한 영국 공사의 영사재판으로 진행됐다. 두 번째 재판은 상하이 주재 영국 고등법원의 검사와 판사가 서울에 파견돼 재판을 진행했는데, 1908년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4일 동안 덕수궁 근처에 위치한 영국 총영사관에서 진행된 정식 재판이었다.

첫 번째 재판에서 베델은 6개월 근신형을 받았고, 두 번째 진행된 정식 재판에서 금고 3주형을 받았다. 피고인인 베델과 상하이에서 파견된 판사, 그리고 베델의 변호를 위해 일본 고베에서 온 변호사는 모두 영국인이었다.

고소인으로 참석한 사람은 통감부 서기관인 일본인 미우라였고, 증인은 대한매일신보의 실질적 제작 책임자였던 총무 양기탁과, 의병장이었던 민종식 등이었다. 한국·영국·일본의 3개국이 관여한 국제적인 재판이었던 셈이다.

베델은 상하이에서 3주간 투옥돼 형기를 마치고 복귀했으나, 일본은 그가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했다는 기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이에 격분한 베델은 소송으로 결백을 증명했으나, 1909년 5월 1일 36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심근확장으로 사망했다.

의학적 사인과는 별도로, 일본의 지속적인 탄압과 모함으로 생긴 스트레스가 결정적인 사망원인이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다.

베델은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곳곳에서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신문사에 답지했고 해외에서도 애도의 소식을 보내왔다.

또한 그를 추모하기 위한 모금운동이 전개돼 양화진의 묘지에 뜻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일본은 베델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을 지우고 훼손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베델이 얼마나 일본에게 두려운 존재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대의 문장가였던 장지연이 쓴 베델의 비명은 온갖 부당한 압력에 맞서 싸운 참된 언론인으로서 그의 높은 기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명(銘)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 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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