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14)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언론은 미디어 곧 매체와 종종 혼용해 사용되는데 언론은 미디어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다양한 형태의 매체 중에서 언론을 구분하는 경계는 매체의 영향력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매체가 여론을 형성할 능력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언론의 자격을 규정한다. 특정한 매체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사회적 여론을 형성한다면 그 매체는 언론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단순히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만 하는 매체는 언론이라고 하지 않는다.

유튜브와 같은 매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이지만, 일정한 여론을 형성하는 영향력은 부족했기에 언론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웠지만, 최근 들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유튜브 채널이 여론을 형성하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이 됐으므로 특정한 유튜브 채널의 경우 언론의 기능을 하고 있다.

출처 픽사베이.
출처 픽사베이.

즉 매체의 영향력이 변화하고 확대되는 것에 따라, 언론으로 새롭게 규정되는 매체도 있고, 기존의 언론이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면 더 이상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종이 신문의 경우 과거 가장 강력한 언론 매체였지만, 종이 신문 구독자는 급격히 줄고 있고, 따라서 여론 형성 기능도 저하돼 더 이상 언론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신문이 생겨나고 있다.

언론이라는 단어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문헌에도 등장하는데, 현대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에 언론은 ‘어떤 논제에 관해 말을 통해 각자의 의견을 나타내는 일’이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언론 이외에 ‘간’과 ‘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웃어른이나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한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현대적 의미의 언론으로 조선시대에 사용된 단어로는 ‘공론’이 있다.

조선시대에 공론은 현대적 의미의 여론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주로 양반계급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의견을 의미했고, 일반 서민들의 의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반 민중들이 의견을 표출하는 통로는 제한적이었다.

신문고가 일반 민중들이 의견을 전달하는 대표적인 매체였으나, 그 효용성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다분히 형식적인 제도로 남았을 뿐 실제로 일반 민중의 의견이 신문고를 통해 지배계층에 전달되어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일반 민중들이 실제로 이용한 여론 형성 수단은 민담·한글 소설·민요·민화·가면극·판소리·유언·동요·소문·민심·풍문·괘서 등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다*. 민담은 민간에 전승되는 민중들의 이야기로, 설화의 하위 장르이다.

민담은 설화에 포함되는 다른 장르인 신화와 전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신화와 전설이 주로 엄숙한 내용이라면 민담은 해학과 유머를 구사한다.

민담은 민중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지고 사회 구조와 지배 계급에 대한 해학과 유머를 포함하고 있기에 민중들 사이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일종의 여론을 형성하는 기능을 가졌다는 측면에서 언론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민담과 더불어 서민들의 언로 역할을 했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한글 소설을 꼽을 수 있다. 한글 소설은 판소리, 민요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글 소설의 내용을 노래와 말로 풀어가는 판소리는 일반 서민들 뿐 아니라 양반 계급도 즐기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다. 대표적 한글 소설로 홍길동전, 흥부전, 춘향전 등은 현재까지도 소설과 판소리로 존재를 이어오고 있다.

한글 소설의 내용은 사회적 비판의식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서민들이 가지고 있던 양반 계급에 대한 불만이나, 사회 제도의 모순에 대한 비판적 내용을 담고 있다.

대표적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의 경우 신분 제도의 모순점을 비판하고 있으며, 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이상향 건설을 제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춘향전도 신분제도의 모순과 양반계급의 이중성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서민들이 갖고 있던 계급 비판 의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한글 소설은 판소리로 만들어져서 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물론 양반들까지 즐기는 예술과 오락의 형태로 이어졌다.

또한 흥부전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한글 소설과 판소리는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과 사회상을 반영하고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것은 물론, 양반 계급에게까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기에 여론 형성 기능을 가진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다.

괘서는 익명으로 공공장소에 내걸은 벽보로 벽서라고도 불렸다. 괘서는 민심을 선동할 목적으로 공공장소에 게시된 메시지이므로 성격으로 볼 때 여론 형성을 목적으로 하기에 언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괘서는 그 익명성으로 인하여 사회적 문제와 혼란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정부에서는 괘서를 불법으로 간주해 금지했고 엄격하게 통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괘서는 다양한 목적을 가진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빈번하게 사용됐다.

888년 신라 진성여왕때 익명으로 시정을 비방하는 게시물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충렬왕 때인 1298년에는 궁궐에 괘서가 게시되는 큰 사건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빈번하게 괘서로 인해 사회적 충격이 발생했다.

1547년에 당시 세도가였던 윤 대비와 이기를 비방하는 괘서가 게시됐고 이는 곧 정미사화의 도화선이 됐다. 괘서로 인한 사건은 한말까지 꾸준히 이어졌는데, 1898년 독립협회를 비방하는 괘서가 나붙자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지도자를 구속했다.

대중매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기에도 괘서나 판소리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제한적이나마 여론을 형성하는 언론의 기능을 가진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존재했다. 다양한 형태로 여론을 형성했던 언론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와서, 현대의 언론에도 반영됐다고 보겠다.

*김영주, "조선왕조 초기 공론과 공론 형성 과정 연구," 언론과학연구 2권 3호 (2002년 12월)

*강준만, 한국언론사, 인물과사상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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