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23)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조선 최초의 순 한글 민간신문이던 독립신문의 성격은 신문을 주도적으로 창간한 서재필의 성향이 크게 반영됐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 당시 미국 시민권자였고, 미국 시민으로서 미국 공사관의 도움을 받고 조선 정부로부터 여러 특혜를 받으며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따라서 독립신문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의 이력을 살펴봐야 한다.

1864년에 태어난 서재필은 1882년 최연소로 증광시 문과에 합격하고 1884년 스무 살 약관의 나이에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역적으로 몰려 그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풍비박산이 된다. 서재필은 제물포로 도주해 일본 상선의 도움으로 망명길에 오르는데, 일본에서 박대를 받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다.

미국에서 독지가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해 미국 의사면허를 취득한 서재필은 1894년 필립 제이손(Phil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다. 그리고 곧 미국 대통령을 지낸 제임스 뷰캐넌의 사촌 형제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의 딸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한다.

약관의 나이로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실패하고 역적으로 몰려 망명길을 떠난 지 불과 10년만에 미국에서 의사가 되고 대통령 가문의 딸과 혼인을 했으니, 서재필의 재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부모 형제는 물론 아내와 자식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고 홀로 떠난 망명길이었고 언어도 전혀 모르던 낯선 타국에서 서재필이 어떤 고난을 겪고 어떤 삶을 살아냈을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가 미국에서 보낸 10여 년의 세월은 결코 녹록치 않았을 것이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미국 여인과 결혼하여 철저하게 미국 시민으로 적응하여 살아야 했을 것이다. 미국 시민으로 공화국 시스템에 적응해 살던 서재필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고 미국적 가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살고 있을 때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이 진행됐고 이 과정에서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사면을 받게 된다. 서재필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박영효는 서재필에게 귀국해 조선의 개혁에 동참해 줄 것을 권유한다. 처음 귀국을 거부하던 서재필은 미국으로 찾아온 박영효의 설득으로 1895년 망명을 떠난 지 십여년만에 귀국했다.

독립신문.(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독립신문.(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된 서재필은 곧 순한글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된다. 서재필은 귀국한 이후 영어만을 사용하고 한국어를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고 하는데, 그가 한국어를 잊었을리 없고, 미국 시민권을 충분히 이용하려는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독립신문의 창간 이념은 '언문일치의 실현', '염가신문의 지향', '국민권익의 최우선', 3가지였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부터 연말까지 국문 3면과 국문 내용을 축약한 영문 1면으로 편집했고 화·목·토요일 3회 발행했다.

1897년 1월부터는 국문판과 영문판을 각 4면씩 발행했다. 영문판 제호는 ‘The Independent’였다. 영문판은 1899년 9월 14일을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됐고 국문판은 1898년 7월 1일부터 매일 발행했고 1899년 12월 4일 폐간됐다. 독립신문은 총 776호를 발행했다.

독립신문은 외국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비판적 논조를 보였으나, 미국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논조를 유지했다. 대중 교육의 중요성이나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등 진보적인 색채를 보였고 자치단체장의 주민직선제를 주장하는 등 서재필의 입김으로 보이는 미국적 가치관이 반영된 모습을 보였다.

독립신문은 또한 위생과 청결을 강조해, 길가에 대소변을 보지 말고, 하수도를 정비하고, 물을 끓여먹을 것을 강조하는 기사를 자주 내보냈는데, 이는 서재필이 미국에서 세균학을 전공한 의사였기 때문에 위생 문제에 집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신문은 기독교와 기독교 국가들을 찬양하는 태도를 견지하는데, 이들 국가들의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조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논조는 서재필이 갖고 있던 미국 시민으로서의 태도가 적극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독립신문은 창간 당시 300부를 발행했고 폐간할 당시에는 3000부를 발행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독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재필은 독립신문 1부를 200명이 돌려봤다고 말하기도 했다. 따라서 당시의 발행부수는 큰 의미가 없고 신문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발행부수보다 훨씬 더 컸다.

독립신문은 최초로 광고면을 독자적으로 갖추고 적극적으로 광고를 유치했으며 유료 광고를 통해 전체 수입의 10.6%를 충당했다. 이 또한 서재필이 미국 신문에서 받은 영향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창간호에 실린 광고가 9개였고, 이중 영문 광고가 4개였다. 전체 광고를 광고주 국적으로 분류하면 조선 40%, 일본 18%, 영국 18%, 독일 10%, 국적 불명의 외국 광고주가 10%였다.

독립신문은 외국뉴스도 비중 있게 다뤘는데, 1897년부터는 영국 로이터통신과 계약을 맺고 외신을 공급받아 실었다. 또한 국내외에 분국을 설치했는데, 국내 분국은 제물포, 원산, 부산, 파주, 송도, 평양, 수원, 강화 등에 설치했고 상하이에 해외 분국이 있었다.

특히 제물포 분국 즉 인천에는 외국인 에이전트까지 있었는데 이는 당시 인천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제 무역항으로 분주했던 인천에는 외국인 에이전트까지 배치했던 것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