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18)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으로 인정받는 한성순보는 관보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나름 의미 있는 내용으로 최초 신문의 역할을 했다. 과거 관보에서 보기 어려웠던 시사 문제나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기사를 통해 근대 신문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한성순보가 발간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영향이 컸다. 특히 기술적 측면에서 일본에 의존했다. 박영효와 유길준이 일본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고 나서 신문 창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발행을 추진했고, 박영효가 일본에서 데리고 온 일본인들이 한성순보 발행에 참여한 것을 볼 때, 한성순보의 발행에 있어서 일본의 영향은 상당히 컸다.

비록 신문의 창간에 있어 일본의 영향이 컸으나, 신문의 내용까지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한성순보가 가장 많이 다뤘던 외국 국가는 중국으로, 총 453회에 걸쳐 중국 관련 기사를 실었다. 일본 관련 기사는 53회로 중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다른 국가들 관련 기사의 횟수도 중국 기사 분량에는 한참 못 미쳤다.

일본 사상가 유키치의 영향을 받아 창간했고, 일본 기술에 의존해 신문을 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기사가 이렇게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조선이 전통적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중요시했다는 측면과 더불어 당시 신문 발행에 관계했던 사람들이 모두 한문에 능통한 사람들이었고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 기사를 작성한 사람들이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가 거의 대부분 중국어 자료였기에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한국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출처 문화재청)
한국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출처 문화재청)

특이한 사항은 중국 다음으로 베트남과 프랑스를 많이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략했던 당시의 국제 정세를 반영한 것이고 조선에서 주의 깊게 지켜본 사건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베트남은 남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베트남 관련 기사는 총 165회, 이와 관련된 프랑스 기사는 71회로 두 국가와 관련된 기사는 중국을 제외한 해외 국가 기사로는 가장 많았다.

한성순보의 논조는 당시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를 내세우며 침략을 일삼는 것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태도를 견지했다.

일례로 유럽 제국이 아프리카를 침략해 식민지를 건설한 것에 대해 그 책임을 제국주의 국가에게 묻기보다는 개화하지 못한 아프리카의 야만성 때문으로 돌렸던 것을 보면, 당시 한성순보를 발행하던 사람들이 가졌던 인식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은 19세기 유럽 사회에서 유행하던 사상이었는데, 1880년 이후에 조선에도 알려졌고 유길준과 윤치호 등은 사회진화론을 적극 받아들였다. 사회진화론은 찰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사회 발전에도 적용한 사상으로 적자생존과 양육강식을 바탕으로 사회가 진화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정당화하는데 적합한 사상이었고, 이를 받아들인 조선의 지식인들이 제국주의를 비난하기 보다는 계몽운동에 적극 나서고 부국강병을 추진한 밑바탕이 되었다.

한성순보가 다뤘던 국내 기사는 주로 정부 자료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전반적인 사회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지 못했다는 한계를 보였다. 관보의 성격이 강했기에 정부 정책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견해는 다루기 어려웠다는 점도 한성순보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한계였다.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부국강병을 주장했지만 위정자들의 책임이나, 국내 문제와 결부한 기사는 찾기 어려웠다.

한성순보의 창간호 사설에는 “우리는 우리나라의 여러 군자들이 쓸데없이 시비하지 말고 오직 실사구시를 기할 것을 원한다... 낮에는 부강의 방책을 생각하고 밤에는 이용의 방법을 연구함에 분발하여 끼니까지 잊어야 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곧 한성순보가 추구하는 방향이 실사구시라는 것을 창간호 사설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고 아울러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부국강병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성순보가 한국 최초의 신문으로서 갖는 의미가 있지만, 한계도 명확했다. 당시 복잡하게 얽혀있던 조선의 정치 지형에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여러 세력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이런 측면은 한성순보가 다루었던 기사에서도 나타난다.

즉 언론으로서 사회 비판과 권력 감시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제국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서구의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국제정세를 해석하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한성순보는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폐간된다. 한성순보를 개화파의 아성으로 여긴 군중들이 박문국에 난입해 인쇄기를 파괴했고, 총 41호 발행을 끝으로 한성순보는 폐간됐다. 최초 신문은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발행되고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폐간되는 운명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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