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36)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인천에서 일본인이 창간한 신문인 인천경성격주상보가 이후 제호를 바꾸며 국내 전체 규모를 넘어 해외 지사까지 설치한 신문으로 발전하게 된 배경은 인쇄소인 인천활자소가 1889년 설립된 것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인천활자소는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인 9명이 출자해 설립한 인쇄소인데, 인천의 각국 거류지 제19호(지금의 중구 중앙동 2가)에 위치해 있었다. ‘인천사정’은 인천활자소가 조선에서 처음 설립한 인쇄소라고 기술하고 있다.

근대식 인쇄소인 박문국이 설치된 것이 1883년이었고, 1884년에는 민간인쇄소인 광인사가 설립됐으므로 인천활자소가 조선 최초의 인쇄소라는 인천사정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지만, 비교적 개화기 초기에 인천에 인쇄소가 설치됐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인천에 인쇄 수요가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인천 거주 일본인들 다수가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인천이 주요 무역항이었던 만큼 인쇄 수요도 많았을 것이다.

1906년 발간한 가뎡(정)잡지.(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1906년 발간한 가뎡(정)잡지.(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인천활자소를 설립한 주주들 중, 사노세이지는 인천경성격주상보를 창간했고, 아오야마는 조선신보를 인수해 발행했으니 인쇄소가 매체의 발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천의 신문은 인쇄소의 존재에 힘입어 일찍 발행을 시작했으나, 잡지는 그렇지 못했다. 인천부사를 보면, 1908년에 상계월보를 비롯해 조선기상월보와 순보 등이 발행됐고, 1925년 합장, 1927년 박수 등의 잡지가 발행된 것으로 기술했다.

내리교회 담임목사 조지 존스(한국명 조원시)가 1900년 12월에 발간한 월간지 ‘신학월보(神學月報)’를 인천 최초 잡지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신학전문지인 ‘신학월보’는 인천뿐 아니라 한국에서 최초로 발행된 신학 잡지로 인정하는 문헌도 있으며, 한국의 기독교 역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다. 초기에 600여부를 인쇄했으며 교회 소식과 전도사들의 신학 논문이 실렸다.

신학월보 이외에 일부 문헌에서 인천에서 발행된 잡지로 기술되고 있는 소식지 형식의 간행물에는 제물포청년회의 ‘제물포’가 있었고, 이외에도 비슷한 성격의 ‘인천청년’ ‘인천불교청년회보’ ‘새가정’ ‘개척’ ‘정의’ ‘아이생활’ 등 다양한 간행물이 발행됐다.

개척은 한국 최초의 지역 문예지로 인정받는데, 1920년 2월 15일에 인천 내리교회 기관지로 발행됐다. 1927년에는 인천 지역의 문학청년들이 발행한 문예지인 ‘습작시대’가 발간됐다.

그러나 이들 인쇄물은 종교나 문학, 또는 기상 등을 다루는 특수 분야의 전문지이거나 특정 단체의 회보 형식의 간행물이었기에 엄밀한 의미의 잡지라고 인정하기 어렵다.

종합적인 내용을 다루는 정기 간행물을 잡지로 분류하는 정의에 따라서 ‘소년’을 한국 최초의 잡지로 인정하듯이, 진정한 의미의 인천 잡지는 1937년 일본인 서영일이 발행한 ‘인천’과 같은 해 1월 29일 동아일보 기자 김도인이 발행한 ‘월미’라는 것이 정설이다. 국문으로 발행한 잡지로 국한해 보더라도 월미를 인천 최초 잡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월미는 국한문 혼용으로 발행했고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만평도 있고 스포츠, 음악, 과학, 가정 상식, 문학 작품 등 다양한 주제의 글을 싣고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잡지로서 면모를 갖춘 지역 잡지였다.

동아일보 인천 지국장 김헌식, 각인백미조합 부이사 이흥선, 인천체육회 총무 유창호, 연희전문 교수 갈훈기 등이 창간 축사를 썼다. 그러나 아쉽게도 월미는 창간호를 발행하고 중단됐고 해방 이후가 돼서야 다시 발행됐다.

일본인에 의해 일본어로 발행된 잡지 ‘인천’은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주 독자층이었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는 내용이었다. 현존하는 인천은 화도진 도서관 소장의 5권이 전부이기에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남아있는 자료의 내용으로 미뤄 추측해보면 주로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이 많았다.

침략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당시 일본 상황을 전하고, 전쟁 참여를 부추기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광고는 인천 지역의 상업 관련 광고가 많았는데, ‘금파’ ‘하야 사진관’ ‘미두 취인원 퇴호상점’ 등 지역 상점의 광고가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지금 현재 인천에서 발행되는 인천 잡지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인천 지역이 갖는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원인이 크다고 하겠다.

과거 서구 문물이 먼저 상륙하고 상업이 발달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인천이 번성하던 시절에는 서울과 근접한 지정학적 위치가 장점으로 작용해 신문이나 잡지도 선도적으로 창간됐다.

그러나 서울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작금에는 인천의 매체 환경이 오히려 과거보다 더 퇴보했으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황해문화라는 독보적인 잡지가 인천에서 발행되고 있지만, 그 이외에 지역을 다루는 종합지 성격의 잡지 환경은 매우 척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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