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20)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우리나라 최초 신문인 한성순보는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폐간됐다. 한성순보를 개화파의 아성으로 인식한 군중들이 혼란의 와중에 박문국을 습격하여 인쇄기 등의 시설을 파괴했기에 더 이상 신문을 발행할 방법도 없었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이후 급진개화파가 몰락하고, 정부 요직을 차지한 시무개화파 인사들은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는데, 그런 개혁의 일환으로 박문국을 재정비해 새로운 신문을 발간했다. 한성순보가 폐간된 지 14개월 후인 1886년 1월 25일에 새로운 신문인 한성주보가 창간됐다.

한성주보는 여러 측면에서 한성순보를 이어서 발행한 것이었지만, 한성순보가 폐간된 후 일 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조선에는 더욱 많은 서양 문물이 들어왔고, 이에 따라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성순보는 발행 주기가 10일이었는데, 한성주보는 7일을 주기로 발행했다. 이것은 곧 서양식 달력을 받아들인 것으로, 일주일의 개념을 도입해 주간신문으로 발행한 것이었다.

한성순보가 한문을 사용하였던 것에 비해, 한성주보는 국한문혼용으로 발행했다는 차이점도 두드러진다. 또한 한성순보가 정부 관리들을 대상으로 발행했고, 주로 관리들이 읽는 신문이었던 것에 비해 한성주보는 비록 소수지만 민간인도 구독하는 신문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한성주보(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성주보(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성주보는 전반적으로 한성순보를 복간한 성격이 강했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성주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광고가 게재됐다. 1886년 2월 22일자 한성주보 17면에 세창양행의 광고가 실렸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광고이다.

세창양행은 독일 무역회사로 홍콩에 동양 전담 사업부가 위치해 있었고, 중국 상하이와 톈진, 일본 고베 그리고 인천에 지점을 설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광고주는 인천 소재 기업이었던 것이다.

세창양행은 다양한 상품을 취급했는데, 초창기에는 염료나 면포 등 생필품을 취급하다가 추후에 기계, 무기, 철 등의 산업재도 취급하였고 1890년대에 접어들며 광산 채굴권과 철도 매설권 등의 이권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한성주보에 실렸던 세창양행의 광고 전문을 보면 당시 취급하던 상품 내역이 상세히 나와 있다. 아울러 공정한 가격으로 매입 및 판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있다. 광고 전문은 아래와 같다.

“1886년 2월 22일/3월 8일/5월 24일/31일/6월 30일/7월 5일, 獨逸常事(독일상사) 世昌洋行(세창양행)의 告白(고백), 17면 1단

알릴 것은 本行(본행)에서 이번에 朝鮮(조선)에 虎(범 호)·獺(수달 달)·貂(담비 초)·鼠(쥐 서)·牛(소 우)·馬(말 마)·狐(여우 호)·狗(개 구) 각종 皮貨(피화, 모직물류)와 人髮(인발, 사람 머리칼)·牛馬猪(우마저, 소·말·돼지)의 鬃尾角瓜(종미각과, 말 갈기·꼬리·뿔·열매)·蛤螺(합라, 조개·소라)·烟(연)·紙(지)·五棓子(오배자, 한약재))·古銅錢(고동전, 낡은 돈) 등 물건을 사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貴客(귀객)·商賈(상가)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물건은 그 수량이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모두 사들이고 있으니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本行(본행)에 와서 공평하게 交易(교역)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기록하여 알립니다. 사들이는 여러 가지 물품 牛皮(우피)·馬皮(마피)·狗皮(구피)·虎皮(호피)·貂皮(초피)·灰鼠皮(수달피)·馬尾(마미)·牛尾(우미)·馬鬃(마종)·牛角(우각)·猪鬃(저종)·人髮(인발)·紙(지)·五棓子(오배자)·虎瓜(호과)·蛤螺(합라)·烟(연)·古銅錢(고동전).

알릴 것은 독일 商社(상사) 世昌洋行(세창양행)에서 朝鮮(조선)에 상사를 개설하고 외국에서 自鳴(자명) 鐘表(종표)·洋景(양경)·八音琴(팔음금)·琥珀(호박)·玻璃(파리)·各種(각종) 洋燈(양등)·洋鈕扣(양유구)·各色洋羽紗緞(각색양우사단)·洋標(양표)·布疋(포필)에서부터 衣服(의복)의 染料(염료)와 선명한 顔料(안료)·洋針(양침)·洋線(양선)·自來火(자래화) 등 각종 물품을 수입하여 물품의 구색을 맞추어 공정한 가격으로 팔고 있으니, 모든 貴客(귀객)과 士商(사상)이 찾아오신다면 염가로 팔 것입니다.

銀洋(은양)은 시세에 맞게 계산하여 아이나 노인이 온다 해도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바라건대 本行(본행)의 牌(패)를 확인하시면 거의 잘못이 없을 것 입니다.

새로 수입한 각종 물품 洋標布(양표보)·各色染料(각색염료)·洋褡褳(양답련)·緣染料(연염료)·漂洋布(표양보)·各樣洋扣(각양양구)·漂褡褳(표답련)·琥珀(호박)·頂厚洋布(정후양보)·洋腰帶(양요대)·洋藍色(양감색)·鐘表(종표)·本色二細布(본색이세보)·洋燈(양등)·洋紗(양사)·洋景(양경)·羽紗(우사)·玻璃(파리)·洋線(양선)·自來火(자래화)·洋針(양침)·八音琴(팔음금)”

세창양행 광고를 통해 당시 조선이 수출하던 물품의 종류는 동물 가죽이나 사람의 머리털 등 모피류가 많았고, 수입해 판매하는 물건은 유리, 서양 직물, 염료, 자명종 등 공산품으로, 19세기 말 조선의 무역 현황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초의 신문광고를 집행한 광고주가 비록 외국 기업이지만 인천 소재 기업이었다는 것은 당시 인천의 위상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개항하고 난 후 불과 몇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1886년 당시 인천이 중요한 무역항으로서 발돋움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초의 광고 이외에 한성주보의 다른 기사를 통해 당시 개항장이었던 부산과 원산과 비교한 인천의 위상도 가늠해볼 수 있다. 1886년 3월 1일자 기사에는 각 도시가 걷어 들인 1년간의 수입 세금을 기록하고 있는데, 멕시코화폐로 계산한 액수가 인천 8만851원6각8푼, 부산 3만3830원8각이, 원산 2만4022원1각4푼으로 인천의 세수가 다른 개항장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압력에 의한 개항이었고, 추후 수탈의 통로가 되는 아픈 역사이지만, 인천이 개항장으로서 또한 국제 무역항으로서 활발하게 기능했고 서구의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도시였다는 사실을 한성주보의 기사와 광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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