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16)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최초의 신문이 언제 어디서 등장했는지는 신문의 정의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여러 주장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유럽에서는 1605년에 독일에서 발행된 ‘Relation aller Fürnemmen und gedenckwürdigen Historien’을 최초의 신문으로 인정하고 있다.

세계신문협회(The World Association of Newspapers)와 많은 학자들이 세계 최초의 신문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그 이전의 다른 간행물과는 달리 정기적으로 매주 인쇄해 발행했다는 조건을 충족했기에 최초 신문으로 인정하고 있다.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인쇄문화가 발달하며 다양한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도 신문이 발행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관보인 조보를 최초의 신문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조보는 조선 초기에서부터 1895년까지 승정원에서 발행한 조정의 소식지이다. 주로 조정의 소식을 필사해 양반 관료들에게 배포했다. 중종실록에 의하면 1520년 조보가 발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18년 12월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민간조보. 영천역사문화박물관 지봉스님이 소장하고 있다. 1577년 발행.(출처 경북 영천시 홈페이지)
2018년 12월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민간조보. 영천역사문화박물관 지봉스님이 소장하고 있다. 1577년 발행.(출처 경북 영천시 홈페이지)

1577년에 민간에서 발행한 조보 형식 간행물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간행물은 관보의 형식을 차용해 민간에서 상업적 이윤을 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신문의 형태로 발행이 됐는데, 필사로 유통된 승정원의 조보와 달리 인쇄한 신문의 형식으로 발행했다.

조보는 세로의 크기가 35㎝이고, 길이는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다. 발행일자를 매호의 첫머리에 적었고 별도의 제목이나 기사 제목도 없었다. 특별한 편집 원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사건이 처리된 순서에 따라 기사를 기록의 형식으로 작성했다.

조보의 서체는 ‘지별글씨’라고 불리는 초서체를 사용했다. 조보는 한문으로 작성했으나 이두식 표현도 사용됐다. 당시 조보를 인쇄할 기술은 이미 충분한 수준이었으나, 인쇄하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왕이 묵살했고 필사로만 발행했다. 필사를 고집한 것은 유통 범위를 제한해 정보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보인다.

민간 조보는 1577년 음력 11월 6·15·18·23·24일자로 발행된 5건의 인쇄물이 확인되고 있는데, 만일 이런 형식의 인쇄된 조보가 거의 매일 혹은 일정한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발행됐다면 유럽의 신문에 훨씬 앞서 발행된, 이론의 여지없이 세계 최초의 신문으로 인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간 조보가 발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선조가 자신의 허락 없이 발행됐다는 것을 문제 삼아 민간 조보를 폐간시켰다. 선조는 민간 조보 발행 관련자 30여 명도 유배형으로 처벌했다. 이로 인해 민간 조보는 짧은 기간 동안 인쇄물로 발간됐다는 흔적만 남기고 다시 정부에서 필사로 발행하는 조보 형태로 돌아가게 됐다.

조보는 발행 목적이 정부의 정책을 알리는 관보의 성격을 가졌으므로, 왕이 내린 명령이나 지시, 조정이 내린 결정 사항, 그리고 관리의 임면 사항 등 주로 정부 정책이나 정보와 관련한 내용을 주로 다뤘다.

당시 지배 사상이던 유교를 전파하는 내용의 정보도 다뤘고, 유생이나 관리가 올린 상소문과 상소에 대한 왕의 답변도 실렸다. 또한 관리들이 올리는 각종 보고서도 게재됐다. 조보에 실린 이런 내용들은 조보가 당시 관보의 성격을 가지고 관리들 사이에서 정보교환 수단으로 사용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보는 중앙과 지방 관리들에게 배포됐고, 지방에 배포된 조보는 그곳에서 필사돼 다시 하급 관리들과 지역 양반계층에게 배포됐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조보의 배포 대상도 변화해 처음 관리들에게 국한됐던 독자층이 점차 확대됐다.

19세기 말에는 외국 영사관에서도 조보를 구입할 수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근대식 인쇄술을 사용한 관보가 만들어지면서 조보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됐다.

조보는 필사로 발행됐다는 성격의 특성상, 그 내용이 반드시 동일하지 않았다. 지방으로 내려가서 필사가 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기도 하고, 누락되는 내용도 있었다.

프랑스인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의 저서 조선서지에 의하면 조보의 내용이 동일하지 않고 고관들에게 배포된 조보일수록 그 내용이 더 완전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각 지역에서 필요한 정보를 수록했다는 측면에서 중앙판과 지방판의 성격을 가졌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필사에 의존한 성격으로 인해 발생한 불완전성이라 보겠다.

조보는 그 성격상 온전한 신문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으로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관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농사와 관련된 내용이나 사회적 사건 등도 실렸던 성격으로 미루어, 인쇄돼 널리 배포됐다면 세계 최초의 신문으로 인정받았을 수 있었을 것인데 아쉬운 일이다.

조보가 필사를 고집하고, 민간에서 인쇄해 발행한 민간조보가 왕에 의해 폐간된 것은 곧 조선 시대 지배계급이 정보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에 언론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쇄술을 세계 최초로 발명했고, 신문 발행의 필요성도 제기됐고 필요한 기술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의 편협한 권력욕으로 언론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측면은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한계이자 역사적으로 매우 아쉬운 일이다.

*신문과 언론의 정의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조보를 신문이나 언론으로 분류가 가능한지 여부가 결정된다. 정기적으로 간행됐다는 조건에는 부합하지만 소수 정부 관리를 대상으로 하는 필사 소식지의 성격은 엄밀한 의미의 신문이나 언론이라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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