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27)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조선신문은 인천뿐 아니라 한반도를 넘어 당시 일본의 식민지에서 발행되던 신문들 중에서도 특별한 성격을 가졌는데, 당시 일본어 신문들이 대부분 정치적 기사를 주로 게재하던 것과 달리 유일하게 상업적 성격의 신문이었고, 또한 인천에 굳게 기반을 두고 있는 신문이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당시 경쟁지였던 경성일보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성격이었던 것에 비해 조선신문은 조선에서 민의를 대표하는 신문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민간지 성격이 강했다.

일본전보통신사에서 발행한 ‘신문총람’에 의하면 “鮮滿(선만)신문계의 최고의 역사를 가지며 선만의 사정에 정통하고, 선만에서 유일한 실업기관으로서 공업에, 상업에, 농업에 투자하고자 한다면 조선신문을 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조선신문은 조선뿐 아니라 만주까지 아우르는 상업지로서의 성격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조선신문.
조선신문.

이와 같이 조선신문은 관보의 성격이 강했던 경성일보와 차별화된 민간 상업지 성격이 강조됐으며, 창간 이후 항만, 철도, 병원 등 당시 인천의 모든 현안을 망라하는, 인천의 일본인 자본가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성격을 가졌다.

창간 이후 곧 사세를 확장하며 인천을 넘어 전국을 커버였고, 인근 국가들까지 영역을 확장하며 인천에 기반을 둔 언론사로서 서울의 경성일보와 더불어 한반도 최대 언론사로 발돋움하였다.

민간지 성격을 강조했지만, 조선신문의 사세가 발전한 것은 사실 일본 정부의 조직적인 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조선신문의 전신인 조선신보는 아오야마 1인에 의해 발행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영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아오야마 혼자 활자 식자에서 인쇄까지 담당해서 발행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런 사정은 아오야마가 죽고 나카무라가 신문을 인수한 이후에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기에 재정 상태는 항상 쪼달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사장 나까무라가 인천상업회의소 이사직을 맡아서 받은 보수로 신문사를 운영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열악했다.

상황이 이렇듯 좋지 않았기에 일본영사관에서 재정 보조금을 제공한 것은 신문사의 경영을 안정시키는데 필수적인 재원이었다. 따라서 조선신보의 성장은 일본영사관 보조금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일본영사관이 신문의 공신력을 뒷받침해 주었다는 점도 조선신보가 주요한 신문으로 자리 잡는데 기여한 요인이었다.

한글로 발행하던 민족지인 독립신문도 조선신보의 기사를 인용했고, 황성신문의 일본 관련 기사 대부분은 조선신보를 인용한 것이었다. 조선신보가 가졌던 영향력과 신문의 성격은 새롭게 창간된 조선신문이 고스란히 이어받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은 경영에 필요한 재정으로부터 완전 자유로울 수 없다. 현대의 언론이 광고주의 눈치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영사관의 재정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조선신문은 비록 독립적인 민간 신문을 표방했지만 일본영사관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인천 시절의 조선신문은 상업지로서 주로 상업에 필요한 정보와 뉴스를 전달하는데 치중했기에 상대적으로 정치적 기사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따라서 민간 상업지로서 차별화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9년 12월 서울(경성)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신문의 성격도 변화하게 된다. 사실 인천에서 발행되던 시절에도 경제 소식 위주의 기사가 많았고, '민중'을 대표한다고 표방했지만, 인천지역에 거주하던 자본가와 상인 등 주로 상류층 일본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성격이 강했다.

조선신문은 1909년에 인천축항문제에 대한 사설과 기사를 오랜 기간 연재했는데, 상업에 종사하던 이들 일본인 자본가들의 이익과 연관이 깊었기에 인천축항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논조를 유지했다.

서울로 본사를 이전한 이후에는 상업 정보뿐 아니라 정치적 기사를 많이 다루었고, 점차 상업지로서의 성격은 약해지고 정치적 성격이 강화됐다. 조선신문은 서울로 이전해 간 이후에 1942년 2월까지 발행되고 폐간됐다.

조선신문이 인천에서 출발하여 굳건하게 인천에 뿌리를 두고 전국적인 신문으로 발전하였지만 종국에는 서울로 이전하였다는 것은, 인천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인천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서울과의 관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씁쓸한 사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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