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37)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매스미디어(mass media)는 대중매체를 말하는데, 여기서 대중(mass)은 불특정 다수를 지칭한다. 곧 대중매체라고 인정받으려면 불특정 다수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양한 종류의 매체가 인류 역사 초기에 등장하고 지금까지 발전해왔지만, 대중매체라는 특성을 부여받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대중매체의 등장이 가능했던 것은 광고가 매체의 속성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소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인쇄물은 그 가격이 고가였기에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매체였다. 그러나 광고가 등장해 매체에 광고료를 지급하기 시작하면서 매체의 가격이 하락했고,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됐다.

곧 대중매체의 시대가 열린 것이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광고의 존재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중매체가 전달하는 정보를 공짜로 제공받거나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하고 있다. 광고주가 지불하는 광고비로 매체의 발행 비용을 상당부분 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매체의 출현에 결정적 기여를 한 광고는 간판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문화권에 관계없이 대부분 옥외광고의 한 형태인 간판이 광고의 기원을 이루고 있다.

간판의 역사는 매우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확인된 유적으로 보면 고대 폼페이 유적지에도 간판이 발견됐으며, 다양한 고대 도시 문화권에서 여러 형태의 간판 유적이 발견된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 수도 개성에 간판이 있었다.

“길 양쪽에 연립으로 지어진 시전 건물에는 그것을 빌린 상인들이 건물의 높은 부분에 제가끔의 상호를 적은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1123년에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람이 지은 고려도경에 의하면, 개성의 광화문에서 부급관까지의 길 옆은 시전 건물의 간마다 상호를 밝힌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예를 들면, 永通(영통), 廣德(광덕), 興善(흥선), 通商(통상), 存信(존신), 資養(자양), 孝義(효의), 行遜(행손) 등이 그것이다. 상호의 내용으로도 그 당시의 상혼을 짐작할 만하다.”*

간판.(출처 픽사베이)
간판.(출처 픽사베이)

기록에 의하면 고려의 상점가에 각자의 상업철학이 반영된 다양한 간판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근대 인쇄광고인 세창양행의 광고가 한성순보에 실리기 오래전부터 간판이 광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조선시대의 간판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찾기 어려우나, 상인들이 쪽박에 칠을 한 형태의 간판이나 장대에 특정 물건을 매달아서 상점의 존재를 알리는 형태의 간판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문헌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주막이나 객줏집은 문 앞에 기둥을 세우고 남포등을 고정시킨 장명등을 설치하고 주(酒)자를 새기거나, 상호 명을 써놓고 밤에 불을 켜서 간판으로 삼았다. 이런 형태의 옥외광고는 야간에도 식별이 가능했기에 주로 주막과 같이 어두운 밤에도 존재를 드러낼 필요가 있는 객주 등에서 사용됐다.

또한 국내 각지에 세워진 비석을 정부가 세운 일종의 홍보물로 간주해 광고의 한 종류로 분류하기도 하고, 상업적 메시지는 아니지만 장승도 옥외광고홍보물의 한 가지 형태로 보기도 한다.

척화비는 대표적 정부 광고물이었고, 미국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에 소장된 저포전기(苧布瀍旗)는 모시 장사하는 상점의 광고물이라고 보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옥외광고 즉 간판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판은 개화기에 들어서며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하기 시작하며 다양한 형태의 상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들이 영업을 위해 설치한 간판도 빠르게 증가했다.

상점들뿐 아니라, 개화기 이후에는 붓글씨로 쓴 입간판을 단체나 기관에서도 내걸기 시작했다.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일본어와 한글을 병행하여 표기한 간판이 많았다.

최근 들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복고풍이 유행이 되며, 근대풍의 간판을 내걸고 있는 상점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데, 역사의 아니러니이다. 상호 명에 ‘경성’이나 ‘제물포’등 과거 명칭을 사용하거나 간판의 형태나 글씨체도 근대풍을 살린 간판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인천과 서울의 원도심에선 근대 스타일의 옷을 대여해주는 대여점도 성업 중이며, 흑백사진관도 인기를 얻고 있는데 이들 상점들은 대부분 근대풍의 간판을 내걸고 있다.

미디어 기술은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데, 가장 오래된 광고 형태인 간판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한 형태를 유지하고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으니, 아마도 가장 효율적으로 인간 본성에 호소하는 매체임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강만길, 한국상업의 역사,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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