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21)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한성순보를 계승한 성격으로 발행됐던 한성주보는 1888년 7월 14일 발행처이던 박문국이 폐지되면서 폐간됐다. 박문국이 폐지된 것은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제대로 충당하지 못해 경영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한성주보가 폐간된 이후 조선에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신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1896년까지 7년여 기간동안 근대적 신문이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1885년 5월 15일에는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했고, 여러 열강들의 한반도에 대한 이권다툼 속에서 조선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기력했다. 개항 이후 다양한 근대 문물이 수입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을, 농민을 포함한 백성들의 조세로 전가하는 등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열강들의 한반도 이권다툼과 조선 정부의 무능으로 서민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고 이는 동학혁명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정부의 무능함은 자연스럽게 집권 세력인 양반들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양반 체제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났으며, 동학혁명의 기저에는 체제 전반에 관한 백성들의 불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동학혁명은 이런 격동의 와중이었던 1894년 전봉준이 주도한 농민 봉기로 시작됐다.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청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한 청국이 조선에 15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자 일본도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제물포에 상륙한 일본군은 조선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한양에 진주시켰고, 1894년 7월 24일 경복궁을 점령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함에 따라, 청국과 일본은 1894년 8월 1일 선전포고와 더불어 공식적으로 전쟁에 돌입했다.

개항초 인천 중구 관동 일대 일본인 거류지의 모습. (사진제공ㆍ화도진도서관)
개항초 인천 중구 관동 일대 일본인 거류지의 모습. (사진제공ㆍ화도진도서관)

청일전쟁이 임박했다는 사실이 최초로 보도된 것은 1894년 7월 23일 인천에서 발행되던 일본계 신문 조선신보가 발행한 호외를 통해서였다. 이는 한반도에서 발행된 최초의 호외로, 인천은 최초의 광고를 게재한 기업의 소재지였던 동시에 최초의 호외가 발행된 도시이기도 했다.

호외는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하기 어려웠던 시절, 신속하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호외는 '신문사가 긴급한 뉴스를 속보로 전하기 위해 정기 간행 이외에 임시로 발행하는 인쇄물'로 정의된다. 호외의 형태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본판보다 작은 크기의 형태로 발행하는 것과, 본판의 크기 형태와 동일하게 발행하는 두 가지이다. 대부분의 호외는 본판보다 작은 크기로 발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신보가 한반도 최초의 호외를 발행한 것은 일본에서 최초의 호외로 알려져 있는 ‘별단중외신문’이 발행된지 26년이 지난 후였다. 1868년 5월 16일 ‘중외신문’이 별단판을 발행한 것을 최초 일본 호외로 보는데, 별단은 호외를 뜻하는 extra를 번역한 것으로, 별단, 별보, 별지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다가 ‘호외’라는 명칭으로 통일됐다.

조선신보의 호외가 발행된 시점에는 이미 일본에서 호외가 속보를 전하는 매체로 자리를 잡은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고, 초창기 한반도에서 발행된 호외는 일본이 정립한 호외의 형식을 그대로 차용해 발행됐다. 세계 최초의 호외는 미국의 보스턴 뉴스레터(Boston New Letter)가 1704년 6월 30일에 해적 6인의 처형 사실을 알리는 호외가 인정되고 있다.

조선신보는 인천 조계지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1892년에 창간된 신문이다. 당시 인천에서 발행된 일본 신문들은 일본 상인들을 대상으로 경제 관련 소식을 주로 다루는 경제지 성격이 강했다.

조선신보도 그런 성격을 가진 신문이었다. 이 신문이 청일전쟁 임박을 알리는 호외를 발행한 것은, 특히 일본 상인들에게 민감한 정보였기 때문이고 기사의 내용을 보면 당시 조선에 거주하며 상업에 종사하던 일본인들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청일전쟁의 임박을 알린 조선신보의 호외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당시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을 매우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역사적 기록물로서 가치가 높은 자료인 동시에 당시 조선 조정이 얼마나 취약하고 무능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23일 오전 9시, 양(兩) 3일 래(來) 운각이 향해서 가는 곳을 관찰해보건대, 사태는 날로 절박해지고 오호 전운이 결정되는 것은 아침저녁 시간문제로다. 요즘 날씨처럼 전운도 점차 질주하기만 해 새벽닭 울음소리를 들어가면서 얼핏 눈을 감으니 때는 바야흐로 5시인데 외쳐대는 함성 소리, 울려오는 포성은 멀리 황성 주변으로부터 울리누나.

아병(我兵: 일본군)들은 오늘 새벽 5시 이미 왕성의 주변을 에워싼 채 일부가 성의 뒷문으로 들어가 곧바로 안으로부터 광화문을 열고, 문 앞에서 기다리던 병사들이 이에 합세해 성내로 돌입하니 함성 소리에 성곽도 무너졌다.

5시 30분에 이르러 포성이 오가는 소리에 조선 병사들이 일시에 항복하고 누구도 아병들을 밟거나 차는 등 총검을 사용하지 않고 산산이 토징, 마치 기마가 흩어지듯이 산란시켰는데 대포 15문, 소총 1천정을 빼앗고 그대로 왕성을 점령했다.”(호외로 읽는 한국현대사, 정운현, 2018)

19세기 말, 한반도에서 최초의 신문 광고주와 최초의 호외가 모두 인천 소재였다는 것은 당시 인천이라는 도시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들이 모두 독일과 일본, 외국계였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에 있어서 외세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반증하는 것이기에 씁쓸한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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