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근대 건축문화재기행⑧ 일본18은행·대화조·세관창고

인천투데이=김지문 기자 |

<인천투데이>는 도시개발로 사라져가는 인천 내 근대건축물을 아카이빙하고 문화유산 가치를 시민에게 전달하고자 특집으로 '인천 근대 건축문화재 기행'을 진행한다. 개항·식민·분단 시기의 애환을 간직한 인천의 건축물을 살펴보고 그 의의를 설명한다. <기자말>

인천 개항장은 19세기 당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일본 경공업 자본이 조선 시장에 침투하는 창구였다. 일본은 조선시장을 독점해 아직 서구 열강과 경쟁하기 힘든 자국 공산품 식민지 시장을 장악하려 했다.

중구 신포로 일본제18은행과 대화조 사무소, 내항 1부두 내 옛 인천세관창고 등은 식민지 조선 시장을 모판으로 자라난 일본 자본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주요한 유적들이다.

나가사키 상인들의 주거래은행,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

구)인천일본제18은행지점 (사진제공 천영기 시민기자)
구)인천일본제18은행지점 (사진제공 천영기 시민기자)

1880년대부터 1900년대 당시 일본의 주요 수출품은 면화, 면포, 생사(삶지 않은 명주실), 은 등 1차산업 품목에 집중돼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분야마저도 영국이 수출하는 값싼 인도산 면화나, 미국산 공산품들에 밀려 경쟁하기 어려웠다.

1880년대까지 중상주의 정책으로 자국 제조업 경제 규모를 착실히 불린 일본은 1890년대에 들어 열강과 경쟁할 필요 없이 자국 공산품, 면포를 수출할 독점 시장을 동북아시아에서 필요로 했다.

면포 소비가 많고 자국 면화 산업이 공업화되기 전 조선은 일본 자본에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일본이 조선으로 수출하는 면포 대부분은 나가사키를 기항으로 출발해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인천항에 속속 입항한 나가사키 상인들은 환전과 금융거래를 위한 은행이 필요했다. 1890년 개설된 옛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이 이 나가사키 출신 상인들의 주거래은행 역할을 수행했다.

1890년 10월 제18은행은 일본 본토와 금융업무를 연결해 줄 주거래은행 지점이 필요했던 나가사키 상인들의 요청으로 중구 제물량로 206번길 토지에 인천 지점을 세웠다가 이후 1903년 현 위치로 이전했다.

비슷한 시기 국립은행인 일본제1은행과 오사카 출신 상인들의 주거래처 제58은행도 인천에 지점을 설립했다. 이 은행들은 개항장 내 일본조계지 중심지인 혼마치(本町)를 이루는 주요 건물로 자리잡았다.

일본 상인들은 청일전쟁(1894년) 발발 이전까진 일본 자국산 면포와 광목뿐만 아니라 영국령 인도나 중국에서 싼값에 대량수입한 면포를 조선에 대리판매하면서 중간이익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조선의 제해권과 상권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일본 상인들은 조선 면포시장을 완전 독점했다. 1894년 일본산 면포는 조선 면포 수입의 50% 정도를 차지했지다. 그 뒤 1896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산 면포가 조선 면포 수입의 91%를 차지할 정도로 독점이 심해졌다.

1903년 일제가 18은행을 현 위치로 옮길 당시 올린 상량문이 남아 있어 건축가 다케모토 니키마츠(竹本力松)가 건물을 설계했음을 알 수 있다.

경사가 크게 진 중구 개항장 특징상 18은행은 석재로 기단을 닦은 뒤 벽돌을 쌓았다. 또한 그 위에 다시 석조를 두드러지게 붙여 보는 이들에게 은행이 석축처럼 단단하다는 안정감을 주는 효과를 노렸다.

당시 건축기법상 건물 모서리를 처리하는 벽돌 ‘쿼인’은 보통 긴 면과 짧은 면을 교차하도록 쌓았다. 하지만 설계의 안정감을 강조하기 위해, 양 면의 벽돌 길이를 같게 유지해 교차로 쌓은 특징이 있다.

지붕은 단조로운 일본풍 기와로 마감하고 상부와 좌우측, 입구를 일본과 서양식이 섞인 석조 장식으로 마감했다.

18은행 본점은 아직도 일본 나가사키에서 운영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18은행 인천지점은 1936년 2월 조선총독부가 ‘조선금융기관 정비방침’을 발표하고 조선에 있는 대부분의 일본 은행들을 ‘조선식산은행’으로 통합할 당시 식산은행에 합병됐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1954년, 한국흥업은행이 이 건물을 매입해 인천지점으로 사용하다가 1970년대 유흥주점 ‘열애’에 팔려 술집이 되기도 했다.

이후 2006년 9월 보수공사를 거친 후 인천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으로 변모해 개항장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인천의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공간이 됐다.

‘대화조 사무소’, 시민 노력으로 카페로 부활하다

관동교회 오른쪽에 위치한 구 대화조 사무소. (사진제공 천영기 시민기자)
관동교회 오른쪽에 위치한 구 대화조 사무소. (사진제공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항의 물동량이 늘어나자 항만 하역업의 비중도 커졌다. 일본 상인들은 화물 하역을 하역회사에 하청 주고, 하역회사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싼 값에 고용해 일을 부렸다.

미곡을 수탈하고 가혹한 노동환경을 강요하는 일제의 경제 침략은 조선 민중의 저항을 불러왔다.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발행한 ‘조선신보’를 보면 1892년 5월경 ‘두량군’이라고 불리던 조선인 미곡 운반 노동자들이 일본 상인, 일본과 결탁한 조선 상인들을 상대로 대규모 파업을 선동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노동경제학의 권위자였던 고 윤진호 교수는 ‘황해문화’ 83호에서 ‘1892년 인천 미곡노동자 파업’이 조선 최초의 파업 기록이자 근대적 노동조합 조직의 맹아라는 학설을 기고하기도 했다.

‘대화조(大和組) 사무소’ 또한 이런 조선인 하역노동자 착취로 일군 하역 하청회사 중 하나였다. 대화조의 첫 사장인 히로이케 데시로(廣池亭 四郞)는 타 하역업체에서 일하다 인천으로 이주해 1885년 대화조를 설립했다.

대화조 사무소는 1880년에서 1890년 사이 현 위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층은 대화조의 사무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2층과 3층은 대화조가 고용한 노동자들의 주거공간으로 쓰였다.

대화조 사무소는 1층에 업무공간이, 2층에 주거공간이 있는 일본의 ‘마찌야’ 건축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현재도 마찌야 양식 건물의 특징인 좁고 긴 통로인 ‘토오리’, 1층의 업무·점포 공간 ‘미세’가 당시 목재 그대로 남아있다.

2층 또한 넓은 일본풍 다다미방을 거의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어 당시 인부들의 생활공간을 130년전 그대로 체감할 수 있다. 이에 더해 복원 당시 1890년대 벽 일부가 노출되면서 당시 인부들이 그려놓은 낙서와 만화들이 발견돼 더욱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대화조 사무소의 건축양식은 대부분 1890년대 일본풍 건축양식을 그대로 차용했지만, ‘마찌야’풍 건물이 보통 2층 구조였던 데 반해 대화조 사무소는 3층으로 지어졌다. 이는 일본과 다르게 지진이 적은 인천의 지질에서 기인한 특징이다.

또한 3층을 지어 인천항에 정박하는 선박을 견시하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다.

대화조는 하역노동자 100명과 화물선 17척을 운영하는 대형 회사로 성장했다. 히로이케 사장은 평안남도 남포에 출장소를 두고 철도 화물업과 육상 운송업에도 손을 뻗으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호황을 누렸다.

일제 패망 이후 대화조 건물은 적산가옥으로 분류되고 버려졌다. 이후 인천 지역 문화운동가 백영임씨가 2011년 대화조 건물을 매입하고 인천 향토 역사학자, 건축학자들과 함께 복원에 나섰다.

2012년 복원과 일부 개선을 마친 대화조 건물은 현재 카페 '팟알'로 운영되고 있다. 백영임씨의 복원 노력 덕에 원 건물의 건축학, 역사학적 가치를 그대로 온존하게 간직하게 된 대화조 건물은 2013년 등록문화재 507호로 지정됐다.

다다미와 목재까지 원형을 살린 역사성과 문화공간이라는 활용도를 모두 살린 민간 소유 문화재의 모범 활용사례다.

수인분당선 신포역 2번출구에 남은 ‘구 인천세관 창고’

구 인천 세관창고 (사진제공 천영기 시민기자)
구 인천 세관창고 (사진제공 천영기 시민기자)

조선은 1883년 ‘인천해관’을 설치해 관세 자주권을 유지하려 했다. 청나라가 추천한 고문인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첫 인천해관장을 역임하고 관세를 설정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일본은 인천해관장을 일본인으로 교체하고 대한제국의 관세자주권을 빼앗았다. 청나라식이었던 ‘해관’ 명칭도 일본식 관세 부서 명칭인 ‘세관’으로 바꿨다.

‘인천해관’ 시절 건물은 현재 중국 항동 1~2가 사이에 있었으나, 몇 차례 위치가 바뀐 이후 현재 창고가 남아있는 항동 7가 1-47위치로 옮겼다.

‘인천부사’에 의하면, 인천세관은 총 다섯 번 위치이동을 겪었다. 네 번째 청사를 현재 위치로 이전할 당시 건물을 신축하지 않고 건물 자제를 그대로 분해해 현 위치에 재조립하는 특이한 방식을 사용했다.

그 때문에 이전 이후에도 창고의 주 출입구가 우측에서 좌측으로 바뀐 점을 제외하고 구조엔 큰 변화가 없었다.

현존하는 창고 건물에서 출입구를 향해 섰을 때 우측 방향의 벽은 100여년 전 지은 원 건물의 벽돌을 그대로 사용했고, 좌측 벽은 원 건물에서 나온 파벽돌을 재생해 쌓았다.

1911년 세관창고가 현 위치로 이전할 당시 창고 지붕은 석면 재질이었지만, 현재는 시멘트 기와로 교체했다. 벽체 좌우에 간격 4.68m마다 부벽을 설치해 벽을 보강하고 디자인상 안정감을 강화했다.

또한 1918년 인천항의 교역규모가 늘어나면서 창고 길이를 8.95미터 늘리는 증축을 진행했다. 현재 남아있는 창고는 증축 부분을 철거했기 때문에 1911년 당시 지어진 크기와 거의 동일하다.

인천세관 건물 본관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됐다. 창고 3곳과 화물계, 선거계 사무소는 그 이후로도 원형을 유지했지만, 2010년 수인선 신포역 2번출구 예정지와 남은 창고 2곳의 위치가 겹쳐 결국 창고 2곳은 철거됐다.

현재는 서쪽으로 40m정도 이전해 살아남은 창고 1곳과 화물계, 선거계 사무소만 인천세관 역사공원에 남아있다. 수인분당선 신포역 2번출구는 인천 세관창고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기념해 세관창고와 같은 양식의 붉은 적벽돌로 입구와 기둥을 사용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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