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근대 건축문화재기행 송현배수지 제수변실과 대한민국 수준원점

인천투데이=김지문 기자 |

<인천투데이>는 도시개발로 사라져가는 인천 내 근대건축물을 아카이빙하고 문화유산 가치를 시민에게 전달하고자 인천 근대건축물 기행 특집을 진행한다. 개항·식민·분단 시기의 애환을 간직한 인천의 건축물을 살펴보고 그 의의를 설명한다. <기자말>

예로부터 동북아시아 주요 국가들은 치수를 통치의 근본으로 삼았다. 인천의 역사 또한 백제의 공동 시조 비류왕 시기부터 2020년 수돗물 애벌레 사건까지 치수와 함께했다.

일본 또한 조선을 식민 지배하며 치수에 신경을 썼다. 일본은 단순히 조선 거주 일본인에게 수도를 공급할 목적뿐만 아니라 치수 비용을 명목으로 수 많은 차관을 대한제국에 부담시켜 대한제국 경제를 종속시키려 했다.

동구 송현동의 송현배수로 제수변실과 미추홀구 용현동 인하대학교 내 대한민국 수준원점은 물을 이용해 조선을 장악하려던 일제와, 해방 후 그 잔재를 청산하고 새 기준을 세워 나아가는 한국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일본 거류민 편의를 위해 대한제국이 빚을 진 ‘송현배수로 제수변실’

송현배수지 제수변실
송현배수지 제수변실

인천은 바다와 인접해 수원지 대부분이 염도가 높아 일상용수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또한 말라리아와 장티푸스 등 수인성 질환이 유행해 깨끗한 물의 필요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이에 개항장에 거주하던 인천 내 일본거류민단은 임시 급수위원회를 만들고 문학산에 수원지와 상수도 시설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으나 수량과 자금이 부족해 포기했다.

이후 1905년 설계사 나카지마 박사가 노량진 수원지에서 인천까지 상수도를 잇는 대규모 수도망을 설계했다. 노량진 수원지는 수량이 풍부해 인천까지 수돗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원지와 상수도 공급망의 거리가 당초 수원지로 예상했던 문학산보다 멀어진 탓에 자금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해졌다.

인천일본거류민단과 나카지마 박사의 사정을 청취한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부 통감은 대한제국을 압박해 인천 수도망 건설비를 충당케 했다. 결국 대한제국은 관세 수입을 담보로 일본흥업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인천에 수도망을 지어야 했다.

1908년 노량진에서 끌어온 물을 낙차로 인천에 공급할 정류시설인 송현배수지가 송림산 정상에 세워졌다. 이 때문에 송림산엔 수도국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정수시설과 수도관 설치 공사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당하고 난 뒤인 1910년 12월에 끝났다.

수도관은 철저히 일본 거주민의 편의에 맞춰 공급됐고, 사용량 대부분은 중구 일대 일본인 거주구역에 집중됐다. 조선인 중 극소수만이 수도를 이용할 수 있었다. 조선인 대부분은 수도가 나오는 일본인 거주지 쪽 물 장사에게 물값을 내고 상수도 물을 사야 했다.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은 배수관의 유압을 조정하고 수돗물 공급·차단을 결정하는 벨브실이다. 철근을 쓰지 않은 콘크리트로 원통형 몸체를 만들고 일본식과 서양식이 섞인 의양풍 입구를 그리스풍 페디먼트(지붕과 지붕 사이 붙이는 삼각형 박공)로 장식했다.

현 송현근린공원 공중화장실 위치엔 제수변실과 송현배수지 전반을 관리하던 수도사무소 목조건물이 위치해 있었다. 공중화장실을 마주보고 오른쪽을 보면 제수변실로 향하는 돌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 또한 배수지 건설 당시 지은 것으로 준공한지 110년이 넘었다.

제수변실의 페디먼트 위에는 그리스 양식과 걸맞지 않은 ‘만윤백량(萬潤百凉)’이라는 석재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백번 흐르고 만번을 적신다’는 뜻으로 일진회에서 활동한 거물급 친일파 ‘유맹’이 쓴 글이다.

송현배수지는 지금도 동구와 중구 일부 지역에 생활용수를 공급중이다. 다만 제수변실은 1994년 재정비 이후 사용하지 않고 2003년 11월 인천시 등록문화재 23호로 지정됐다.

한국 건축의 기준을 스스로 세우다 ‘대한민국 수준원점’

인하대학교 내부에 위치한 대한민국 수준원점 (사진제공 인하대)
인하대학교 내부에 위치한 대한민국 수준원점 (사진제공 인하대)

각 나라들은 자국 만조수면과 간조수면의 평균값을 계산한 뒤 지상에 설치한 수준원점(水準原點) 시설물의 높이를 그 평균값과 맞춰 해발 고도를 책정한다.

일본은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인천, 목포, 청진 등 검조장 5곳에서 3년간 측정한 해수면 높이의 평균을 수준원점으로 삼았다. 당시 수준원점은 인천시 중구 항동1가 2번지 현 인천중부경찰서 앞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정한 수준원점은 수치가 확실하지 않고 일본 도쿄의 조석간만 물때를 기준으로 계산했기 때문에 한국 풍토에 전혀 맞지 않는 기준이었다.

이에 더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검조장 5곳과 각지의 수준원점들이 대부분 파괴되면서 한국에서 고도를 측정하는 일이 더욱 힘들어졌다.

휴전 이후 한국 건축가들은 일본 도쿄의 수준원점을 따르거나 거주지에서 가까운 해수면을 임의로 측량해 원점으로 사용하는 등 통일된 기준이 없었다.

1963년 국립지리원은 수준원점 기준 통합을 목표로 인천의 조석간만 평균값을 계산해 해발고도 0m를 결정했다. 이후 국립지리원은 기반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단단하고 평탄하며, 인하대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어 유지 보수가 쉬운 현 위치에 수준원점을 표시했다.

수준원점은 화강암 표석을 원형 적벽돌 건물 보호벽으로 두른 모습을 하고 있다. 내부엔 화강암 사이 단단히 고정된 자수정 위에 눈금으로 수준 원점이 표시돼있다. 현 수준원점은 해발고도 26.6871m에 위치해 있다.

당시 수준원점은 한국 측량 발전의 중대한 결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수많은 측량기술자들이 고도계 기준점을 맞추기 위해 국내 각지에서 인하대로 몰려들었다.

인하공업전문대학 학생회는 수준원점 설치를 기념하며 대학축제에 ‘원점’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수준원점 설치 이후 한국 건축물들은 비로서 일제가 남긴 잔재의 기준을 타파하고 한국 스스로 세운 기준 위에서 우뚝 설 수 있게 됐다(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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