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근대 건축문화재기행⑦ 제물포구락부와 제물포고 강당

인천투데이=김지문 기자 |

<인천투데이>는 도시개발로 사라져가는 인천 내 근대건축물을 아카이빙하고 문화유산 가치를 시민에게 전달하고자 인천 근대건축물 기행 특집을 진행한다. 개항·식민·분단 시기의 애환을 간직한 인천의 건축물을 살펴보고 그 의의를 설명한다. <기자말>

개항장은 ‘교류’의 공간이자 ‘분리’의 공간이었다. 훗날 제국주의 식민지배자가 될 일본인들은 개항장에 살며 조선인과 일본인의 생활공간을 끊임없이 분리하려 노력했다.

인천 중구 송학동의 ‘제물포구락부’와 중구 전동의 ‘제물포고등학교 강당‘은 인천이라는 같은 공간 속, 분리된 세상을 살아가던 식민지배자 일본인과 피억압민족 조선인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근대건축물이다.

국제교류의 장에서 일본 재향군인 놀이터로...‘제물포구락부’

제물포구락부 야경(최준근 사진작가 작품, 제공 인천시)
제물포구락부 야경(최준근 사진작가 작품, 제공 인천시)

제물포구락부는 개항장 외국인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1891년에 세운 사교클럽이다. 원래 위치는 중구 관동 1가 8-2번지였지만 1901년 6월 22일 현재 위치로 옮겼다.

1892년 아오야마 고헤이(青山光平)가 쓴 ‘인천사정’에선 당시 제물포구락부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인천의 일본, 청나라, 서양 각국 사람들이 서로 의논하여 지난 메이지 24년(1891) 8월에 구락부 하나를 열고 제물구락부라 불렀다. 구락부는 인천항의 산수(山手)에 있는데 인천소학교 옆에 서양풍으로 색칠한 건물이다. 이곳에는 문화적인 오락기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 인천 신사들의 유일한 오락장소로 손색이 없다. 회원은 서양인 6명, 중국인 4명, 일본인이 24명이다.”

당시 제물포구락부를 이용하던 회원은 일본인이 다수였으나 아직 국제 교류의 장이라는 명목을 유지 중이었다. 제물포구락부 개장식 당시 영국 공사 허버트 고페가 기념 연설을 벌였고, 호러스 알렌 부부가 참가해 큰 관심을 보인 것이 예다.

제물포구락부의 관리는 각국조계지의 자치공동체 신동공사(紳董公司·Municipal Council)가 담당했고, 내부엔 ▲도서실 ▲당구대 ▲바 등이 있었고 실외에는 테니스 코트가 있는 등 서구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을 거치며 청인과 유럽인 상류층 상당수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남은 외국인들도 1914년 조선총독부가 각국조계를 철폐하면서 대부분 인천을 떠났다.

국제 교류·사교의 장이던 제물포구락부 역시 일본인들만 향유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제물포구락부는 ‘정방각(精芳閣)’으로 이름을 바꾸고 일제 재향군인의 휴양지로 쓰였다.

이후 1934년 일본부인회가 이 건물을 매입해 부인회관으로 사용했다. 일본부인회는 조선인 강제징용, 징집을 지지하는 가두행진을 벌이거나 조선인들에게 왜왕을 위해 옥쇄할 것을 선동하는 등 제국주의 선전의 첨병으로 활동했다.

제물포구락부는 해방 이후에도 아픈 역사를 담았다. 1945년 말 미군이 인천에 주둔하고 부평 일대를 병참기지화 하면서 제물포구락부는 미군 소유의 클럽으로 바뀌었다. 1946년 4월 1일엔 인천시립박물관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남하한 조선인민군은 고지대에 위치한 제물포구락부 건물을 장악하고 대대 본부로 사용했다. 인민군 본부가 있던 제물포구락부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주요 표적이 됐다.

남측군이 인천을 수복한 이후, 인천시립박물관 다시 제물포구락부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전쟁 중 유물 대부분이 포격에 파괴돼 소장품 복구엔 시간이 걸렸다. 이 외에도 인천시의회와 인천시교육청이 잠시 제물포구락부에서 업무를 보기도 했다.

인천시립박물관은 1990년 제물포구락부 건물에서 현 연수구 청량로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건물은 시립박물관 수장고, 중구 문화원 등으로 사용되다 2007년과 2019년 개수를 거쳐 복합문화공간으로 변모했다.

제물포구락부 건물은 지상 1층, 반지하 1층 건물로 원래는 건물 정면과 우측에 있었으나 현재는 건물 좌측에 주 출입구를 새로 뚫었다. 벽돌로 지었지만 벽돌 위에 모르타르를 바르고 페인트를 칠해 벽돌 건물 느낌을 지우는 건축방식을 사용했다.

원래 반지하와 1층을 잇는 계단이 있었으나 1층 마루를 확장하면서 계단을 없엤다. 계단은 단순 통로 역할 뿐 아니라 반지하 공간의 습기를 뺄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됐다.

조선인 차별 교육의 온상에서 민족교육의 산실이 되다...'제물포고 강당'

인천부립중학교 개교 당시 세워진 현 제물포고등학교 강당 (사진출처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부립중학교 개교 당시 세워진 현 제물포고등학교 강당 (사진출처 천영기 시민기자)

광복 직전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 인구는 70만명에 육박했다. 이들은 대개 인천, 목포, 부산, 서울 종로 등 일본인 집중 거주구역에 살았고 식민지 조선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던 조선 민중과 분리된 삶을 살았다.

특히 개항장이 있던 인천은 일본인 인구수가 많은 지역이었다. 1930년 인천 인구 6만4729명 중 일본인은 1만1758명으로 18% 이상을 차지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친일파와 자본가들은 자녀를 일반 조선인이 재학하는 중등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와 실업·상업학교 등에 입학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 당시 인천의 중등교육기관은 인천공립상업학교와 인천여자고등보통학교 등 여성학교나 실업계 학교 뿐이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친일파 자녀들의 입학난을 해소하려 1935년 4월 1일 현 중구 전동 일대에 ‘인천부립중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모집했다. 이후 제물포고등학교의 강당이 될 건물 또한 이 시기 함께 지어졌다.

교육 분리는 일제가 조선인을 분열시켜 통치를 용이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인들이 다니는 ‘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인과 친일파들이 다니는 ‘중학교’는 현재 학제상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중등교육기관이었다.

하지만 조선인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은 일본 정부로부터 초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소학교’ 졸업한 것으로만 취급됐다.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이 대학에 진학하려면 조선에서 1곳만 운영하던 사범학교를 사비생으로 입학하는 방법 뿐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본은 친일파와 조선인 부호들을 식민 지배 계층에 포함시키고 한민족을 분열시켰다.

민족교육자 길영희 교장 동상. (사진출처 천영기 시민기자)
민족교육자 길영희 교장 동상. (사진출처 천영기 시민기자)

1945년 해방 이후 일제가 물러가자 독립운동가이자 민족교육가인 길영희 선생이 인천 시민들의 추대로 인천부립중학교 교장직을 수행했다.

길영희 선생은 인천부립중학교를 6년제 ‘인천중학교’로 개명하는 한편, 1954년 학제 개편에 맞춰 인천중학교 4~6학년생을 분리해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인천중학교는 1972년 중학교 평준화정책으로 폐교하지만 제물포고등학교는 해당 위치에 남아 강당의 소유권 또한 제물포고등학교로 넘어갔다.

제물포고등학교 강당은 현재도 학교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 일부 훼손돼 수리한 것을 제외하면 원형을 많이 유지하고 있다.

강당은 조적 양식을 사용해 내부가 넓고 기둥이 없다. 지붕은 경사가 한차례 꺾이는 맨사드 양식과 유사한 구조를 채택했지만, 사방으로 꺾이지 않고 좌우 양방향으로만 단조롭게 각을 세웠다.

또한 주출입문과 벽에 창문이 많아 채광이 편리하고 건물 상부에 커다란 환기창이 있다.

일제의 조선인 분열·분리정책을 상징하던 인천부립중학교는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교육가들의 헌신으로 인천 유수의 중등교육기관 제물포고등학교로 자리잡았다. 개항장은 이렇게 역사의 상처를 시간으로 보듬고 있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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