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근대 건축문화재기행⑪ 대한성공회 내동성당, 강화성당, 온수리성당

인천투데이=김지문 기자 |

<인천투데이>는 도시개발로 사라져가는 인천 내 근대건축물을 아카이빙하고 문화유산 가치를 시민에게 전달하고자 인천 근대건축물 기행 특집을 진행한다. 개항·식민·분단 시기의 애환을 간직한 인천의 건축물을 살펴보고 그 의의를 설명한다. <기자말>

인천은 한국에서 기독교 성공회 교세가 가장 강한 지역이다. 국내 성공회 신자 5만여명 중 5분의 1에 해당하는 1만여명이 인천에 살고 있다.

성공회는 개항 시기 의료 봉사로 선교를 시작해 조선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또한 성공회는 토착민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했다. 그래서 성공회는 다른 기독교 종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교회건축물을 한국에 남겼다.

선교사들이 의료 봉사를 하던 중구 개항로 내동성당과 조선 건축양식과 바실리카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성공회 강화성당,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 온수리성당 등은 성공회와 인천 토착민의 화합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1891년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인천 내동교회의 모습.(사진제공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1891년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인천 내동교회의 모습.(사진제공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약대인(藥大人)’ 랜디스 선교사와 성공회 '내동성당'

성공회는 개신교나 천주교보다 한국 선교가 늦었다. 1890년 9월 찰스 존 코프 주교와 의사였던 바 랜디스 선교사 등이 최초의 공식 한국성공회 선교단으로 인천항에 들어왔다.

코프 주교는 1891년 현 송학동 일대에 토지를 매입해 성 미카엘 성당을 설립하고 현재 내동성당이 있는 위치엔 성 루가 병원을 지었다.

성공회는 의료 봉사와 선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존 코프 주교는 조선에 도착하기 전 영국, 캐나다, 미국에서 의술에 능통하고 봉사심이 투철한 성공회 사제들을 수소문했다.

당시 많은 성공회 사제들이 기독교 박해가 종료 된지 채 15년도 지나지 않은 조선에 선교사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존 코프 주교의 선교 여정에 동참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출신 내과의사 바 랜디스와 외과의사 와일스 등이 조선 선교에 동참하며 조선에 병원을 세울 진용이 갖춰졌다.

송학동 성 미카엘 성당은 인천에 머무는 영국인을 대상으로 한 교회였다. 미사도 모두 영어로만 집전됐다. 성당은 또한 개항장 일대 일본인, 중국인 등을 대상으로 영어 교습 학교도 마련했다.

당시 성공회가 조선인에게 진정 열의를 보인 활동은 의료 선교였다. 1891년 10월경 현 내동성당 자리에 성 루가 병원을 세웠다. 성 루가 병원이라는 명칭은 병원 준공일이 성 루가 축일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 루가 병원과 랜디스 박사는 약값을 내지 못할 만큼 가난한 이들에게도 의료를 베풀며 그 명성이 높아졌다. 인천에 살던 조선인들 사이에선 송학동 성 미카엘 성당보다 내동 성 루가 병원이 훨씬 유명했다. 해마다 조선인 약 2000여명이 성 루가 병원을 찾았다.

한국전쟁으로 성누가병원 터에 새로 지은 성미카엘성당. (사진출처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한국전쟁으로 성누가병원 터에 새로 지은 성미카엘성당. (사진출처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상권).

성 루가 병원 조선사람 친근하게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 개명

당시 조선인들은 헌신적으로 의료 봉사에 임한 랜디스를 ‘약대인(藥大人)’으로, 성 루가 병원이 위치했던 응봉산 남단을 ‘약대이산’으로 부르며 존경했다.

랜디스 또한 조선사람을 단순히 시혜의 대상으로만 판단하지 않았다. 조선인의 문화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인들이 아직 기독교 사도 이름(성 루가)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랜디스는 병원 이름을 ‘선행이 즐거워 베푸는 병원’이라는 뜻의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는 조선 문화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다. 당시 기록을 보면 랜디스는 조선말을 유창하게 구사했다. 한문 또한 읽을 줄 알았다. 이 같은 어학능력을 바탕으로 랜디스는 한국의 민속사와 구전설화, 문화를 취합한 많은 책을 남겼다.

랜디스 선교사는 조선 민중과 더 가까운 곳에서 의료선교를 벌일 목적으로 조선인 밀집 거주지역인 송림동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898년 4월 16일, 랜디스는 송림동에서 조선인에게 의료봉사를 하던 중 과로와 장티푸스 발병으로 3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 후로도 그와 함께 의료 봉사에 참여한 성공회 선교사들이 성 루가 병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영국의 지원이 끊기자 성 루가 병원도 자금난으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1921년 비어버린 병원 건물에 훗날 성공회대학교가 되는 ‘성 미카엘 신학원’이 들어섰다. 하지만 1940년 일제는 신사참배와 전쟁지지를 거부한 영국 성공회를 적성종교로 지정하고 성 미카엘 신학원 또한 강제 폐교시킨다.

서울 성공회대학교는 인천 ‘성 미카엘 신학원’이 모태

해방 이후 성공회는 다시 인천에 자리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성 미카엘성당이 완파되면서 성공회는 새 성당을 지어야 했다.

성공회는 송학동 성 미카엘 성당 토지를 팔아 자금을 모았다. 1956년 6월 옛 성 루가 병원이 있던 자리에 ‘내동성당’을 새로 열었다.

내동성당은 커다란 화강암 벽돌로 지은 바실리카 양식 석조건물이다. 외벽 사이사이에 일부러 틈새를 두며 적벽돌을 쌓은 ‘영롱쌓기’ 기법을 채용해 입체감을 살리고 틈새 사이로 빛이 들어와 성당의 신성함을 강조할 수 있게 했다.

성당 지붕 구조는 언뜻 보면 조선 목조건축에 나타나는 처마 양식과 유사하다. 하지만 재능대학교 손장원 교수 등 향토 근대건축물 권위자들은 내동성당의 처마가 조선식이 아닌 그리스 로마의 코니스식 처마 표현법이라고 설명한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사진 제공 강화군)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사진 제공 강화군)

영국 신부와 경복궁 도편수가 함께 세운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1893년 조선 정부는 영국 해군 교관을 초빙해 강화도에 ‘총제영학당(통제영학당이라고도 함)’을 세우고 장교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조선의 군사력이 강해질 것을 우려한 일제는 총제영학당 운영을 방해했다.

총제영학당이 폐쇄된 후 성공회 트롤로프 신부는 총제영학당 토지를 매입해 강화성당의 토대를 마련했다.

마크 네이피어 트롤로프 신부는 이 토지에 강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성당을 설계하고, 1900년 ‘강화 성 베드로와 바울로 성당’을 완공했다.

트롤로프 신부는 한학과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강화도 토착민의 문화를 존중했다. 트롤레프 신부는 새 성당이 강화 사람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게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참가한 도편수들과 함께 조선 전통 건축양식과 바실리카 양식을 융합한 방식을 착안해 설계했다.

강화성당은 조선 건축양식과 서양 교회 양식 융합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물이다. 성당 본당은 서양식 건축자재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러나 성당 중앙 회랑인 신랑(네이브)의 높이를 높여 밖에선 2층 건물로 보이게 했다. 또한 상부 구조물에 넓은 창문과 천장공간을 배치해 조선식 기둥으로 바실리카 양식의 공간을 살려냈다.

강화성당 각 건물은 ▲외삼문 ▲내삼문 ▲본당 ▲사제관으로 구성돼 있다. 조선 유학자들은 향교나 문묘를 지을 때 선현들의 영혼이 드나드는 가운데 문(신문神門)과 사람이 드나드는 양 옆의 문(인문人門) 등 문 세 개를 배치하고, 건물 안에 배향 공간을 마련했다.

강화성당은 이러한 조선의 건축에 배인 유교양식을 성당 건축에 녹여내 강화 유학자들과 백성들의 삶과 성공회를 융합하려 했다.

불교양식도 끌어 들였다. 불교식으로 마련한 종각에 범종을 달았고 타종구에 십자가를 부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 일제의 탄압과 공출로 원본은 녹아버렸다. 현재 범종은 1989년 새로 봉헌한 것이다.

트롤로프 신부는 강화성당을 조성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성당을 지을 목재를 구하기 위해 백두산에서 적송을 사고 영국에서 철골을 구해오는 등 최고의 재료를 엄선했다.

1914년 성 미카엘 신학원이 강화성당에서 개교했다가 1921년 앞서 얘기한 성 루가병원으로 옮기기도 했다. 성당은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1984년 성당 기와 교체작업 중 큰 불이 나 사제관이 전소됐고, 현 사제관은 1986년에 다시 지었다.

대한성공회 온수리 성당 (사진제공 대한성공회 권석준 신부)
대한성공회 온수리 성당 (사진제공 대한성공회 권석준 신부)

강화에서 피어난 선교의 결실, 대한성공회 강화 온수리성당

성공회의 조선 토착화 전략은 강화도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1900년대 길상면 일대 명문가였던 광산 김씨 양반가를 포함한 많은 유지들이 당시 성공회에 귀의했다.

부유한 양반 가문이었던 광산 김씨 일가는 온수리 일대에 평신도들이 모일 수 있는 새 성당을 짓기로 했다.

특히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던 김영선, 김영지 형제가 성당 건축에 큰 도움을 주었다. 김영선은 이후 성공회 신학을 공부해 온수리성당을 관할하는 사제가 되기도 했다.

길상면 광산 김씨 가문과 트롤로프 신부는 온수리 일대 땅을 매입해 1906년 ‘온수리 성 안드레 성당’을 완공했다. 성당 입구는 양반가가 집을 지을 때 흔히 올리던 솟을대문 양식을 채용했고, 강화성당과 마찬가지로 외삼문을 두었다.

온수리성당 또한 조선 건축양식을 많이 차용했다. 지붕에 중와를 올리고 내림마루와 추녀마루, 단골마루 3단으로 마감했다. 지붕 건축에 조선 건축 양식을 살리면서 팔작지붕 용마루 장식을 전통 양식 대신 성공회 십자가를 달아 서양 문화와 융합을 이뤘다.

온수리성당은 조선 고유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지만 구조 자체는 성공회 성당의 형식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다. 평면은 바실리카 양식으로 입구부터 제대(祭臺)까지 이어지는 긴 회랑과 신자석,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이들이 참관할 수 있게 개방하는 ‘나르텍스’를 뒀다.

온수리성당 아래 한옥 양식으로 지은 사제관이 있다. 서구식 성당의 위계질서를 참고해 성당을 높은 곳 짓고, 사제관을 아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제관은 원래 한옥 건축 양식을 잘 보전하고 있는 건물이었으나, 2000년 보수공사로 일부 원형을 잃었다.

2004년 새 성당이 옛 온수리성당 옆에 들어서면서 몇몇 축일을 제외하고 온수리성당은 예배당 기능을 하고 있지 않다. 온수리성당은 몇 차례 개·보수를 거쳐 원형이 일부 훼손됐다. 최근 보수공사를 진행하며 변형된 부분을 철거하고 옛 사진과 기록을 참고해 다시 가까워졌다(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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