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근대 건축문화재기행⑩ 창영초 구교사와 영화초 본관동

인천투데이=김지문 기자 |

<인천투데이>는 도시개발로 사라져가는 인천 내 근대건축물을 아카이빙하고 문화유산의 가치를 시민과 공유하기 위해 인천 근대건축물 기행 특집을 진행한다. 개항·식민·분단 시기의 애환을 간직한 인천의 건축물을 살펴보고 그 의의를 설명한다. <기자말>

개화와 개항은 학교부터 시작된다. 신식 학교는 조선에 서구 문물을 도입하고 사람들에게 학구열을 증진시키는 순기능과 함께, 학습과정에 일본의 통치 이념을 주입하는 아픔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 또한 갑오개혁(1894년)을 전후로 학교를 세우고 교육 기회를 넓히려 노력했다. 동구 우각로에 위치한 창영초등학교 구교사와 그 바로 옆에 위치한 영화초등학교 본관동은 당시 조선 민중의 교육열과 자립의 열망을 보여준다.

110년이 넘는 민족 교육의 역사, 창영초등학교 구교사

인천 창영초등학교 구교사 전경 (사진제공 창영초)
인천 창영초등학교 구교사 전경 (사진제공 창영초)

1895년 갑오개혁 이후 조선은 지방 주요 도시마다 공립학교를 설치했다. 대부분의 공립학교들은 옛 향교나 인구가 밀집한 지역에 세워졌다. 창영초등학교의 모태가 된 ‘인천공립소학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천공립소학교의 창립 위치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당시 많은 관공립학교들처럼 옛 인천향교 위치에 세워졌다는 설이다.

다른 가설은 일부 사료들이 인천공립소학교를 ‘인천항공립소학교’라고도 기록한다는 점에 의거해 내동 인천항 감리서 인근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인천공립소학교는 조선의 자력 근대화 노력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러일전쟁(1904~1905년) 이후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면서, 학제 또한 일본에 종속됐다.

1906년 ‘보통학교령’이 발효된 후 인천공립소학교는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꿔 다시 개교했다. 창영초등학교는 현재 보통학교로 이름이 바뀐 1907년을 개교연도로 삼고 있다.

인천공립보통학교는 재녕학교, 인명학교 등 민족자본이 세운 학교들을 합병해 그 규모가 훨씬 커졌다.

재녕학교는 러일전쟁 당시 침몰함 인양사업으로 큰 돈을 번 민족자본가 서상빈이 설립한 학교였고, 인명학교는 1907년 친일파 박영효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려다 실패하고 자결한 독립운동가 정재홍 의사가 세운 학교였다.

또한 인천공립보통학교는 인천 시내 3.1운동의 발상지였다. 3월 1일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외치며 인천시내로 뻗어나갔다. 인파 수만명이 ▲파업 ▲동맹철시 ▲일제 통신선·전신주 파괴 ▲일제 통치시설 습격 등으로 3.1독립운동에 호응했다.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은 강제 휴교를 단행하고 학생들을 처벌했다. 하지만 오히려 학생들은 ‘조선독립일보’ 등의 비정기 간행지를 발행해 시내에 유포하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다.

일제는 인천공립보통학교가 3.1운동의 온상이 됐다는 책임을 물어 학교 인원을 축소하고 7회 졸업생들의 졸업식을 취소했다. 그럼에도 인천공립보통학교는 인천 내 있었던 최고의 교육기관 중 하나였으며, 규모 또한 계속 커져갔다.

1924년 인천공립보통학교는 늘어나는 학생 숫자를 감당할 목적으로 현재 위치로 이전해 새 교사를 지었다. 직사각형 건물에 현관 출입구를 조금 돌출시켜 특징을 준 건축양식을 사용했다.

또한 1·2층 현관 상부에 밝은 화강암 아치를 두어 적벽돌 외벽과 두드러지는 효과를 주었다. 적벽돌이 기본이지만 내벽은 나무심을 넣고 흙을 발라 처리했다.

현존하는 건물의 또 다른 특징은 좌우로 건물을 증축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구 교사 내부 증축한 부분에 돌출된 마루와 특이한 형태의 계단을 찾아볼 수 있다.

인천공립보통학교는 1936년 인천창영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1년 창영국민학교로 개명 후 해방 후에도 사용하다 1996년 현재 명칭인 창영초등학교로 바뀌었다.

1924년에 지은 구교사는 보존상태가 좋고 튼튼해 2010년대 초까지도 특별활동실로 사용했다가 현재는 폐쇄됐다.

한때 야간반을 따로 운영해야 할 정도로 붐볐던 창영초등학교는 인천의 도시 중심지가 신도시로 이동하면서 바뀌면서 입학이 줄었다. 현재 창영초 재학생은 180여명이다.

선교사 존스 부부부터 ‘훈맹정음’ 박두성 선생까지...영화초등학교 본관동

영화초등학교 본관동 야경 (사진제공 동구)
영화초등학교 본관동 야경 (사진제공 동구)

감리교회는 위에 얘기한 창영초등학교 인근에 위치했던 조선 시대 처형장 일대 토지를 매입하고 일종의 교우촌을 건설했다.

감리교회는 이전부터 교육을 매개한 선교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목표로 우각로 일대에 선교사 숙소를 마련하고 교회 건물 내에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 [관련기사] 천주교 답동성당과 감리교 여선교사합숙소

1892년 감리교 선교사 조지 존스와 마가렛 벤젤은 개항장에 조금 더 가까운 내동 내리교회 건물에 첫 학교를 설립했다. 이중 여자 어린이를 위해 세워진 학교가 ‘영화초등학교’의 모태가 된 ‘영화여학교’였다.

학교가 커지고 내리교회 내 학생을 모두 수용하기 어려워지자, 1903년 현 인천기독병원 일대에 작은 벽돌건물을 지어 학교를 교회와 분리했다. 이 건물 또한 1909년엔 비좁아져서, 1911년 여선교사합숙소에 가까운 현 위치에 새 건물을 짓고 이전했다.

이후 영화여학교는 1923년 9월 영화여자보통학교로 바뀌었다. 당시 학생 수는 270여명 수준이었다.

일제강점기 감리교회가 만든 단체들은 인천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후학 양성의 장이 돼주었다.

영화학교 학생들은 1905년 을사늑약을 규탄하며 자결해 순국한 민영환을 추도하는 추도식을 진행하고 여러 신문에 민영환의 죽음을 기리는 ‘충절가’를 송고했다. 내리교회 목사 신흥식은 민족대표 33인이기도 했다.

또한 인천 지역에서 내리교회, 영화학교 학생을 주축으로 세워진 내리교회 엡윗청년회와 내리 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는 조봉암, 박남칠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계몽운동과 봉사활동을 명목으로 독립운동 후대를 양성할 수 있게 했다.

송암이 만든 한글 점자 사용설명서. (제공 송암박두성점자박물관)
송암이 만든 한글 점자 사용설명서. (제공 송암박두성점자박물관)

영화학교는 민족운동 뿐 아니라 시각장애인 인권운동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한국 시각장애인을 위한 첫 점자 ‘훈맹정음’을 창간한 박두성 선생은 영화학교의 교장이었다.

강화군 교동 출신 박두성 선생은 1923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비밀리에 ‘조선어점자위원회’를 조직하고 1929년 ‘훈맹정음’을 발표해 한국 시각장애인들의 인권신장과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했다.

현재 남아있는 영화여학교 본관동은 조감도로 바라볼 때 정십자가 형태를 한 적벽돌 건물이다. 지붕은 각을 두 번 꺾은 ‘멘사드 양식’을 채용했다. 지붕이 드러나는 3층에 넓은 채광창을 두어 통풍에 용이하게 설계했다.

건축 초기 남아있던 정십자가 형태는 돌출부 좌우 빈 부분에 조금씩 방을 증축하면서 사각형에 가깝게 변했지만 3층에서 바라보면 당시 목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영화여학교는 해방 이후 ‘영화여자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다가 1966년 3월 학제를 남녀공학으로 전환하고 ‘샛별국민학교’로 명칭을 바꿨다. 영화남자국민학교가 마지막 졸업생을 배출한 해인 1972년 다시 영화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뒤 1996년 현재 명칭인 영화초등학교가 됐다.

본관동 건물은 견고하게 지어져 준공 110년이 넘은 현재도 영화초등학교 학생들이 다목적 음악실로 사용하고 있다. 예배당이었던 3층은 창고로 사용중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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