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근대 건축문화재기행⑥ 공화춘

인천투데이=김지문 기자 |

<인천투데이>는 도시개발로 사라져가는 인천 내 근대건축물을 아카이빙하고 문화유산 가치를 시민에게 전달하고자 인천 근대건축물 기행 특집을 진행한다. 개항·식민·분단 시기의 애환을 간직한 인천의 건축물을 살펴보고 그 의의를 설명한다. <기자말>

20세기 초 중국 대륙에서 민주주의, 공화주의 혁명의 불꽃이 타올랐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고 쑨원과 중국동맹회가 중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세계 각지 화교는 혁명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화교들은 민중없는 혁명가였던 쑨원과 동맹회의 강력한 지지세력이 되어주었다. 화교들은 후원금을 모아 무기를 사고, 청 황실의 부패를 끊임없이 외국에 폭로하면서 공화국 수립을 위한 혁명 과정에 제 역할을 다했다.

신해혁명 속 화교들이 남긴 헌신의 흔적은 110년이 지난 지금도 ‘공화춘’이라는 이름으로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에 고스란히 서 있다.

혼란스러운 중국, 공화국 수립의 염원을 담아

2006년 등록된 인천 선린동 공화춘 국가등록문화재.(사진제공 인천 중구)
2006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인천 선린동 '공화춘' 건물. (사진제공 인천 중구)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은 대부분 인천과 가까운 산둥(山東)반도 출신이었다. 개항장이 번성하던 시절 산둥의 정치와 사회 상황이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1898년부터 1900년 사이 산둥은 냉해, 가뭄, 대홍수가 번갈아 발생하는 이상 기후에 시달리고 있었다. 청나라 관원들은 당시 발생한 기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여름에도 겨울 내복을 껴입을 정도로 추웠으며, 봄에는 가뭄에 보리가 자라지 않고, 여름에는 황하가 범람해 논이 망가졌다”

청나라 조정은 당시 산둥 일대에 난민 500만명이 발생했다고 파악했다.

정치 상황 또한 불안정했다. 1898년 독일이 산둥반도 일대 조차지(조계지)를 설정하면 중국 내 반외세 감정이 폭발했다. 1900년 발생한 의화단 봉기로 산둥반도는 전쟁터로 변했다.

1911년 신해혁명 전후로도 공화파의 봉기와 청군 북양군벌의 수탈이 이어져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다.

산둥 출신 이민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중국 내 타 지역이나 인접한 러시아, 일본, 조선으로 흩어졌다. 조선에 찾아온 산둥 출신 이민자들은 대부분 고향 산둥반도와 가까운 인천에 정착했다. 이들이 바로 인천 화교 1세대들이다.

1911년 신해혁명이 성공하고 청나라가 붕괴한 이후에도 산둥 지역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공화파 혁명세력과 연합해 청 황실을 무너트린 북양 군벌의 위안스카이는, 정권을 잡자 오히려 공화파를 탄압하면서 중국은 재차 내전 소용돌이에 빠졌다.

특히 산둥성 인근은 위안스카이의 북양군벌 뿐 아니라 만주족의 청 황실 복벽운동, 반외세 공화파 호헌운동, 서구 열강의 침탈이 중층으로 충돌하는 혼란을 겪었다.

산둥 출신 화교들이 ‘공화국의 봄’을 기다리던 이유를 인천 차이타운 소재 공화춘 건물에서 엿볼 수 있다.

산둥 요리 100년 3대 명소 공화춘·중화루·동흥루

1970년대 공화춘 전경 (사진제공 인천광역시 중구청)
1970년대 공화춘 전경 (사진제공 인천광역시 중구청)

1908년 산둥성 무핑(牟平)현 웨이팡(濰坊)촌 출신 화교 위시광(우희광, 于希光)은 고향 사람들과 함께 거주할 숙박시설로 ‘산동회관’을 세웠다.

이후 위시광은 1913년 산동회관 서쪽 절반 건물을 음식점으로 개조해 ‘공화춘’으로 개업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1934년 인천화상상회회원명적표(仁川華商商會會員名籍表)에 회사명을 올리기 전까지는 음식점을 운영했다는 기록이 공식 문서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1917년 인천에 투자하던 ‘원화잔’, ‘양려당’, ‘관문헌’등의 회사가 ‘공화춘’과 합자해 산동회관 건물을 매입했다는 기록이 있어 공화춘이 언제부터 운영했는지 대략 파악할 수 있다.

공화춘과 같은 건물을 사용했던 ‘원화잔’은 공화춘 옆에 여관과 식당을 운영했는데, 1926년 12월 조선식산은행을 폭파한 의열단 나석주 의사가 ‘마중덕’이라는 이름으로 이 원화잔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공화춘은 일본 조계지에 위치한 대불호텔 내 음식점이었던 중화루, 송죽루와 함께 가장 유명한 중국 음식점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산둥 일대의 정치 혼란이 계속됐으므로, 산동을 떠난 뒤 고향 음식을 찾아 가게를 찾는 손님도 끊이지 않았다.

공화춘은 197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다. 20세기 초 개점 당시엔 건물 서쪽 일부만 사용하다가 손님이 늘어나면서 1960~70년대경 건물 전체를 사들여 영업장으로 사용할 만큼 사업이 확대됐다.

그러나 공화춘은 1984년 재정 악화와 소유권 분쟁으로 폐업했다. 건물은 이후 창고로 쓰이다 2012년 4월 중구가 건물을 매입해 ‘자장면 박물관’으로 개장했다.

가정집과 점포, 정원의 조화

1970년대 공화춘 내부 모습, 우물 정(井)자 배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제공 인천광역시 중구청)
1970년대 공화춘 내부 모습, 우물 정(井)자 배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제공 인천광역시 중구청)

공화춘은 197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다. 때문에 식당 자리를 확장할 목적으로 여러 개장이 이루어져 원형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우물 정(井)자를 그리는 내부구조 한가운데 정원 혹은 마당을 배치하는 ‘합원식’ 구조는 오늘날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합원식 건축구조는 1900년대 당시 산둥성 인근에서 유행하던 건축양식이었다. 공화춘 건물을 설계한 사람 또한 산둥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공화춘 건물은 벽돌로 직사각형 벽을 세우고 내부 마루, 보, 지붕를 목재로 구성하는 ‘경산식’ 구조를 채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붕은 목재 위에 점판암을 덧대 습기를 막았다.

중구의 지리적 특성상 경사가 크게 졌기 때문에 건물 기반 일부를 화강암으로 다지기도 했다.

당시 인천 청국조계지에 있던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공화춘은 1층은 음식점, 다방, 옷가게 등의 점포로 사용하고 2층엔 주거공간이 있는 주상병용, 오늘날 말로 주상복합건물로 설계됐다.

원래는 건물 우측에 계단이 있었으나 증축, 보수를 거치면서 현재는 사라졌다. 계단이 있던 우측 벽면과 정면엔 자기 타일 장식이 있었고 좌측 벽면은 모르타르와 페인트로 마감했다.

1984년 공화춘이 폐업한 이후 공화춘 건물은 버려졌다. 이후 공화춘 창립자 우시광의 후손들은 1985년 차이나타운 일대에 '신승반점'을 개점하며 중화요리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공화춘 간판을 달고 있는 중화요리가게는 우시광 일가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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