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근대 건축문화재기행⑤ 답동성당과 여선교사합숙소

인천투데이=김지문 기자 | <인천투데이>는 도시개발로 사라져가는 인천 내 근대건축물을 아카이빙하고 문화유산 가치를 시민에게 전달하고자 인천 근대 건축문화재 기행 특집을 진행한다. 개항·식민지·분단 시기의 애환을 간직한 인천의 건축물을 살펴보고 그 의의를 설명한다. <기자말>

기독교는 개항보다 먼저 조선 민중에게 스며들었다. 바다와 접한 제물포(인천)는 개항 전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밀입국한 수많은 종교인들의 통로이자 순교지가 됐다.

1866년 프랑스의 강화도 무력 점령으로 시작된 병인양요와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 이후, 조선은 쇄국 의식을 높이고자 유동 인구가 많은 주요 포구에서 천주교인을 처형했다.

1868년 무진사옥으로 불리는 천주교인 학살 당시 제물진두에서 인천의 주요 천주교 지도자들이 순교했다. 제물진두의 천주교인 처형은 1871년까지 이어졌다.

1883년 1월 인천항 개항 이후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은 종파를 막론하고 순교의 피가 서린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중구 우현로에 소재한 천주교 인천교구 답동성당과 대한감리교 내리교회 인근 구 여선교사합숙소에서 당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천주교 인천 답동성당 1897년 준공

1937년 6월 촬영한 답동성당의 모습 (사진제공 천주교 인천교구)
1937년 6월 촬영한 답동성당의 모습 (사진제공 천주교 인천교구)

개항 이후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규가 맺어지고 천주교 포교가 합법화됐다. 1889년 인천에 입항한 서양 선교사들은 개항장과 제물포진 순교지에 가까운 해망산 일대에 첫 예배소를 설치했다.

1890년 독일계 프랑스인 니콜라 조제프 빌렘 신부는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 3212평을 매입하고 성당 건설을 준비했다. 이후 후임 르 비엘 신부가 성당 건립 자금을 모으고, 코스테 신부가 설계해 1894년부터 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성당 건설은 순탄치 못했다.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인천 전역을 병참기지로 사용했다. 당시 천주교 측은 일본의 항구 통제로 건축 자재를 구하기 힘들어 성당 건설을 잠시 중단하기도 했다. 답동성당은 우여곡절 끝에 1897년 7월에 완공됐다.

1933년 개조하기 전까지 답동성당은 정면부에 뾰족한 첨탑을 배치한 고딕 양식 지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지붕은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개조를 거쳐 둥근 지붕을 강조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바뀌었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1961년 답동성당은 인천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됐다. 이후 1973년엔 나무 마루를 돌마루로 바뀌고 의자를 설치했다. 1979년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는 등 부분 개조가 이뤄졌다.

1986년 인천 5.3민주항쟁 이후 답동성당 인근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들.(자료출처 인천민주화운동센터)
1986년 인천 5.3민주항쟁 이후 답동성당 인근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들.(자료출처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민주화운동의 성지 천주교 인천 답동성당

답동성당은 한국 민주화운동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메리뇰 선교회 소속이던 답동성당 제임스 시노트 부주교는 박정희 군사정부의 인혁당 조작사건을 폭로했다는 혐의로 국외로 추방을 당했다.

답동성당은 또한 1980~90년대 당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가 벌인 노동운동과 시민사회단체가 벌인 민주화운동 등에 참가했던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보호했다.

1987년 고 노회찬 전 의원 또한 군사정권의 탄압을 피해 답동성당에 피신하기도 했다. 1995년 굴업도핵폐기물처리장 반대 시민운동과 학생운동 당시에도 답동성당은 품을 내주었다.  

현재는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성 덕분에 종교행사 뿐 아니라 순례장소, 결혼 예식장 등으로 많이 찾는 명소다.

창영감리교회 여선교사합숙소 (구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

여선교사합숙소 전경 (사진출처 신현수의 걷기 여행)
여선교사합숙소 전경 (사진출처 신현수의 걷기 여행)

조선 내 기독교 선교가 허용되자, 감리교회는 인천 동구 우각로 일대를 기점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당시 동구 우각로 일대는 사형집행장이 있어 땅값이 싼 편이었기에 넓은 토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시 감리교는 1885년 동구 일대에 내리교회 예배당을 마련했다. 이 예배당을 중심으로 인근에 영화여학교(현재 영화초등학교)등을 설립하며 일종의 감리교 신자촌을 만들었다.

당시 감리교 선교사들은 조선인 건물을 임차해 생활했다. 하지만 서양 선교사와 조선인의 생활환경이 달라 서양식 합숙소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감리교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지회는 인천에 서양식 합숙소를 만들고자 헌금을 모았다. 1904년 현 인천세무서 청사 인근에 남선교사합숙소를, 1905년 내리교회 인근에 2층 적벽돌 건물로 여선교사합숙소를 건설했다.

여선교사합숙소는 북유럽 건축양식을 채용해 급경사가 진 양철 지붕을 세웠다. 또한 건축자재와 창호를 미국에서 들여와 20세기 초 미국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지하에 조개탄을 이용하는 난방장치를 설치해 온수를 공급하고 바닥을 데우는 보일러를 설치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감리교 여선교사숙소는 신식 설비를 갖추고 주변 환경이 쾌적해 식민지 조선 전역 선교사들의 여름 수련회장, 별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여선교사숙소 건물은 해방 이후인 1949년부터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쓰였다. 2003년까지 인근 주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하다 현재는 창영감리교회가 건물을 매입해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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