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근대 건축문화재기행④ 청일조계지 계단과 홍예문

인천투데이=김지문 기자 | <인천투데이>는 도시개발로 사라져가는 인천 내 근대건축물을 아카이빙하고 문화유산 가치를 시민에게 전달하고자 인천 근대 건축문화재 기행 특집을 진행한다. 개항·식민지·분단 시기의 애환을 간직한 인천의 건축물을 살펴보고 그 의의를 설명한다. <기자말>

인천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선을 침탈하려는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개항 이후부터 1894년까지 조선 내 패권을 두고 다투던 청나라와 일본은 인천에 여러 족적을 남겼다.

중구 선린동의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과 중구 선학동의 홍예문이 그 대표적인 흔적이다.

각국조계지 계단 위에서 찍은 사진 (출처 천영기 시민기자의 개항장 기행)
각국조계지 계단 위에서 찍은 사진 (출처 천영기 시민기자의 개항장 기행)

인천 일본조계지,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보급 허브’로

일본은 1883년 9월 체결한 ‘인천구일본조계조약(仁川口日本租界條約)’에 근거해 인천에 일본조계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조계지의 위치는 관동1·2가와 중앙동112가 일대 토지로 규모는 약 7000평(2만3140㎡)이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878년부터 이미 불법으로 인천에 입항해 마을을 만들고 밀무역을 진행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그보다 7개월 늦은 1884년 4월에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체결하고 현 중구 선린동, 항동, 북성동 일대에 규모 약 5000평(1만6529㎡)의 청국조계지를 세웠다.

이후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등이 인천에 조계지를 세우고 상업활동을 벌였다. 각 조계지가 맞닿는 한가운데에 ‘공동조계지’를 조성해 각국의 외국인들이 거주했다.

청일전쟁 발발 직전인 1894년 6월 9일, 일본은 아베 신조 전 일본총리의 고조부기도 한 제9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에게 병력 4500명을 주고 인천에 상륙하게 했다.

제9 혼성여단의 절반은 인천에 남아 각국 병참사령부를 건설했고, 나머지 절반은 1894년 7월 23일 오전 0시 30분 한양을 기습공격했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조선 근왕군은 그날 오후 2시까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경복궁에 침입한 일본군은 고종을 납치하고 24일엔 친일 내각을 세워 조선 행정을 장악했다.

일본은 조선의 행정을 장악한 후 바로 다음날인 7월 25일 선전포고 없이 청나라 군함과 영국의 상선을 기습공격해 격침시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 당시 인천 인구는 약 1만5000명이었다. 하지만 청일전쟁 후 인구의 절반이 넘는 일본군 8000명이 대규모 증파돼 거주공간이 부족해졌다.

일본은 민간인이 거주하는 건물과 타국 조계지를 무단 징발해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 시기 일본 조계지는 크게 확대돼 당시 인천 관내 토지 66%를 차지했다.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

1904년 청일조계지 경계 도로에서 바라본 제물포항. .(1904, 인천광역시사)
1904년 청일조계지 경계 도로에서 바라본 제물포항. .(1904, 인천광역시사)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은 청일전쟁 전후인 1880년 말에서 1890년 초에 지어졌다고 추측된다. 처음 목적은 청일 양국 조계지를 구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인천세관장 관사가 응봉산 정상에 있었기 때문에 세관장으로 향하는 정비하며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다만 응봉산 정상으로 향하는 오르막 도로를 따라 청일 양국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조계지 경계의 역할을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계단은 경사로 중간 중간 평지 4곳을 조성하고 그 사이를 돌계단으로 이어 만들었다.

남쪽에서 자유공원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우측에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대화조 사무소, 대불호텔 등의 일본 건물이, 좌측에는 청국영사관, 청인 집중거주지 계후가(界後街), 스튜어드 호텔 등이 있었다.

청국조계지는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이 인천을 사실상 점령하면서 잠시 폐쇄됐다. 4년 후인 1898년 청국조계지는 다시 문을 열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붕괴된 이후 이 장소는 중화민국 조계지로 이어졌지만 1914년 일본이 조선 내 모든 조계를 폐쇄하면서 조계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조계지의 중심이었던 청국영사관은 중국영사관으로 바뀌어 영업을 지속하다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중일관계가 악화하면서 완전 폐쇄됐다. 현재 청국영사관 터 인근엔 중산중·고등학교와 인천화교소가 있다.

현재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 양측에는 각각 중국과 일본 양식의 석등이 서 있다. 일부 역사학계에선 민선 6기 김홍섭 중구청장 시절 고증을 배려하지 않은 채 일본풍 거리에 배치하는 '나라비'식 석등을 계단에 세웠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일본조계지 불법 확장의 통로 ‘홍예문’

과거 홍예문 모습.(인천도시역사관 전시)
과거 홍예문 모습.(인천도시역사관 전시)

청국조계지와 달리 일본조계지 인구는 끊임없이 불어났다. 일본 거주민들은 각국 조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공동조계지’영역을 사실상 장악했다.

1894년 청일전쟁 직전 인천의 일본인 인구는 4000여명이었다. 그러나 1905년 인천의 일본인 인구는 1만1238명까지 불어나 9978명이었던 조선인 인구보다 많은 수준이었다.

공동조계지 영역을 사실상 장악했음에도, 일본 조계지는 늘어나는 일본인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또한 독일, 미국, 영국 조계지는 땅값이 너무 높아져 일본인이 세를 내고 살기 어려웠다.

이에 조계지 거주 일본인들은 조선인 마을로 눈을 돌렸다. 조계에 토지를 구하지 못한 일본인들은 현재 전동, 신흥동에 있던 조선인 마을에서 헐값으로 토지를 사들여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세웠다.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고 일본군 철도수송 사령부인 ‘철도감부’가 들어서면서 유동인구는 더욱 늘었다.

일제는 응봉산 남서쪽 일본조계지와 북동쪽 일본인 거주지를 연결할 목표로 1903년 응봉산 인근에 ‘홍예문’을 짓기 시작했다. 공사는 1908년 끝났다. 홍예문의 ‘홍예’는 무지개라는 뜻으로 아치형 건축을 의미한다. 

일본 조계 편의를 위해 지어진 홍예문 공사비용의 절반은 조선 정부가 부담해야만 했고, 나머지 절반만 인천 일본인거류민단 등 일본측이 부담했다.

축조 공사 설계는 일본군 공병대가 맡았으나, 부실 설계로 터널이 무너지며 조선인 노동자 50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인구 증가를 고려하지 않고 지어져 이후 터널 폭이 좁아 통행에 불편이 생기기도 했다.

일본은 홍예문 설계 당시 일부러 도로와 터널을 비스듬히 지어 해풍을 막았다. 겉면은 돌로 쌓았지만 내부는 벽돌로 아치를 틀어 올렸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하면서 일본 조계는 필요성을 다해 폐지되고, 일본인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홍예문 안팎으로 거주지를 늘려갔다. 일본조계지의 조선인 주거지 침입의 통로가 된 홍예문은 현재도 당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재 홍예문 모습. 112년 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사진촬영 천영기 시민기자)
현재 홍예문 모습. 112년 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사진촬영 천영기 시민기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