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근대 건축문화재기행② 옛 인천부 청사

인천투데이=김지문 기자 |

<인천투데이>는 도시개발로 사라져가는 인천 내 근대건축물을 아카이빙하고 문화유산 가치를 시민에게 전달하고자 인천 근대 건축문화재 기행 특집을 진행한다. 개항·식민지·분단 시기의 애환을 간직한 인천의 건축물을 살펴보고 그 의의를 설명한다. <기자말>

남북으로 뻗은 개항누리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인천 중구 관동1가에 옛 인천부청사가 나온다. 옛 인천부 청사가 있던 지역은 인근의 옛 대화조사무소, 일본제1은행지점, 대불호텔 등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의 인천 통치 중심지였다.

옛 인천부 청사는 1884년 일본영사관으로 지어졌다. 1933년 6월 25일 재건축했다.  인천부 청사 토지 내 경찰서, 감옥 등이 함께 지어져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으로 쓰였다.  

1945년 광복 이후 경기도 인천시 청사와 인천직할시 청사로 사용됐다. 현재 인천 중구가 구청으로 사용중이다.

구 인천부 청사 건물 모습 (사진제공 중구)
구 인천부 청사 건물 모습 (사진제공 중구)

일본영사관 건물에서 인천부 청사로... 식민지배 ‘첨탑’

인천부 청사는 1884년에 준공한 인천 일본영사관 터에 지어졌다. 일본은 조선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1876년)’에 의거해 제물포(인천), 원산포(원산), 부산포(부산) 등 3포를 강제로 개항하고 인천의 경우 이곳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일제의 조선 침략 전초기지였던 일본영사관은 을사조약(1905년) 이후 자연스럽게 일제의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변모했다.

일본영사관은 을사조약 3개월 후인 1906년 2월 1일 인천이사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1910년 한일강제병탄(한일합병) 이후 인천부청으로 이름을 바꿔 식민 통치구로 뿌리내렸다.

인천부청으로 바뀐 일본영사관 토지 내에 경찰서와 감옥, 순사 숙소 등이 있었다. 일제는 식민지 침탈 이후 1914년 자신들이 머물던 지역을 인천부(현재 중구과 동구 일대)라고 명명했다. 그 외 지역은 부평도호부의 부자와 인천도호부의 천자를 따와 부천군이라고 명했다. 현재 부천시 지명은 여기서 유래한다.   

1919년 3월 24일 부천군 계양면(현 계양구 장기동 일대) 황어장터에서 시작한 대규모 만세운동을 진압한 일제 순사들도 인천부 내 인천경찰서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집회 3일 후 나온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인천부청 내 주둔하던 순사들이 만세운동을 진압하러 간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인천경찰서는 만일을 경비키 위하여 23일 화뢰순사부장의 순사 2명을 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으로 파견하였더라. (중략) 소요자편이 5~6명의 사상자를 내고, 경관은 간신히 범인을 호송하여 주재소로 돌아왔다는 급보가 인천경찰서에 달하므로 본서에서는 그 날 즉시 편천경부가 순사 10명을 데리고 동지로 급행하였다더라”

이날 만세운동에 참가한 이은선 등이 일본 경찰의 폭력 진압에 순국했다. 심혁성, 이담, 최성옥, 김원순, 임성춘, 이공우 등 시위 지도부는 보안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갔다. 인천에서 식민지배 첨병 역할을 수행한 인천부청 내 일본 경찰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1933년 재건축... 위치 이전하자는 조선인 목소리 묻혀

그러나 영사관 건물은 행정기관이 아니라 외교관 거주 목적으로 지어진 탓에 인천부청으로 사용하기엔 공간이 비좁고 시설이 열악했다. 1920년대 중순이 되자 준공 50년이 넘은 좁은 청사를 허물고 재건축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당시 인천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낙후한 인천부 조선인 거주지역 활성화를 목표로 새 인천부청을 인천부 내동 인천감리서(현 중구 내동 스카이타워아파트) 인근으로 이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천부청 인근 토지 소유주였던 일본인 부호들과 관리들은 부동산 가격 하락을 우려해 이전 일본영사관터에 그대로 재건축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1932년 3월 28일 인천부 협의원 투표 결과 14대 12로 인천부 청사를 원위치에 재건축한다는 결정이 나왔다. 중앙일보는 이틀 뒤인 1932년 3월 30일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도했다.

“인천부 청사 현 위치는 일본인들만 많이 살기 때문에 이 기회에 중앙지대로 위치를 이전하자는 안이 제기되어 격론 끝에 2표 차이로 부청사 이전 안이 패했다. 위치이전이 실패한 것과 관련하여 인천 사는 조선인들은 분개하였다. 일본인 의원도 6명이나 찬성했는데 조선인 의원 2명이 반대한 것은 그 심사를 알 수 없다”

중앙일보의 보도 내용을 보면 당시 관내 조선인들이 인천부청 이전을 염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새 건물은 1932년 8월 19일 착공해 1933년 6월 25일에 준공했다. 착공 1년만에 무리하게 건설을 완료했기 때문에 새 인천부청은 부실공사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전 일본영사관 건물보다 공간을 넓혔음에도 불구하고 인천부 사무 증가를 염두에 두지 않아 건축 4년만인 1937년 본관과 별관을 증축해야 했다.

또한 관사는 1908년 신축할 당시 바닥재를 그대로 사용해 훼손이 심했다. 결국 1936년 수리해서 다시 개장했다. 난방설비를 구비하지 않아 관사 사무원들이 불편을 겪었다.

재능대학교 손장원 교수는 자신의 저서 ‘문화재가 된 인천근대건축’에서 "계획 없는 청사 신축은 단순한 부실공사를 넘어 지방행정관서에 난방 장치도 설치하지 못할 정도로 열악했던 조선총독부의 재정상황을 반증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목재에서 철근콘크리트로, 서구 건축 모방에서 모더니즘으로

재건축 이전 일본영사관은 2층짜리 목재 건축물로, 서양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건축 양식을 ‘의양식(擬洋式)’이라고 한다.

서구 열강이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배하는 동안 넓은 발코니와 베란다를 폭넓게 사용하는 양식을 모방한 ‘콜로니얼(식민지) 베란다 양식’도 일부 채용했다.

일본 건축가들은 영사관을 지을 당시 제국주의 시대 서구 열강이 덥고 습한 동남아 지역에 지었던 건물을 모방해 목조 토대를 사용하고 2층에 넓은 발코니를 두었다. 일본 기와로 지붕을 마무리해 일본 전통 건축양식과 절충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콜로니얼 양식 발코니는 일본보다 건조하고 추운 한반도의 겨울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건축 방법이었다.

문화재청이 2009년 발간한 '구 인천부 청사 기록화조사보고서'를 보면 일본영사관은 넓은 발코니를 지었다가 입주민들이 추위를 견디지 못해 발코니 외부에 벽을 증축하고 창문으로 용도를 바꾼 것으로 나온다.

일본 관료들이 얼마나 조선 풍토에 무지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다.

이후 영사관 건물은 철거되고 앞서 얘기한대로 1932년 8월 19일부터 1933년 6월 25일까지 재건축 공사를 했다. 이 기간 일제는 인천공회당(현 중구 송학동2가 18 인성여고 다목적관 자리)을 인천부 임시청사로 사용했다.

1933년 완공된 새 인천부청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모더니즘 양식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졌다. 당시 일제의 건축 유행은 목재와 벽돌을 중심으로 건물을 짓는 ‘조적 구조’에서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하는 쪽으로 변해갔다.

인천부 청사 또한 벽돌 건물의 양식을 일부 채용한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져 건축 양식 변화의 과도기 상황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수평의 긴 띠창과 벽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기둥이 하중 전체를 지탱하는 ‘커튼월(curtain wall) 기법’등 조선총독부 소속 건축설계사들이 선호하던 모더니즘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현 중구청 전경 (사진제공 중구)
현 중구청 전경 (사진제공 중구)

인천부청, 중구청이 되어 인천의 품에

광복 이후 경기도는 일제가 남기고 간 인천부청을 경기도 인천시청으로 사용했다. 1960년 인천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본관 동쪽 별관을 2층으로 증축했다.

1960년대 초 본관에 3층을 추가했다. 1980년대 초엔 4층을 추가로 지어 사무공간을 확장 했다. 현재 중구청은 1980년대에 올린 4층을 철거해 3층 건물로 남아있다.

한때 식민지 조선 민중의 항일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순사들이 숙식을 해결하던 인천부청 내 경찰서와 감옥 터에 2004년 중구의회 청사가 들어섰다.

인천부청은 경기도 인천시가 1981년 인천직할시로 승격하고 1985년 12월 9일 인천시청을 남동구 구월동으로 이전한 뒤 중구청으로 쓰이고 있다. 2005년에 중구가 내부를 전면 수리해 1933년 당시 실내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외부는 본관 출입구와 출입구를 가로지르는 기둥, 창문 일부는 1933년 신축 당시 양식을 유지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컸다. 정부는 2006년 4월 14일 국가등록문화재 249호로 지정했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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