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근대 건축문화재기행③ 옛 인천우체국

인천투데이=김지문 기자 |

<인천투데이>는 도시개발로 사라져가는 인천 내 근대건축물을 아카이빙하고 문화유산 가치를 시민에게 전달하고자 인천 근대 건축문화재 기행 특집을 진행한다. 개항·식민지·분단 시기의 애환을 간직한 인천의 건축물을 살펴보고 그 의의를 설명한다. <기자말>

우정사업본부가 2019년까지 인천중동우체국으로 사용했던 옛 인천우체국(중구 제물량로 소재)은 1923년 일제강점기 12월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름은 ‘인천우편국’이었다.

인천우편국은 조선 거주 일본인을 위한 우편 배송과 조선의 우편사업 장악을 목표로 1884년 일제가 설립했다. 우편국은 한때 옛 인천부 청사 터 안에 있었다.

하지만 인천 갑문이 세워지고 물류, 우선회사들이 갑문 근처로 이전하자 인천우편국도 1923년 현재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인천우편국은 해방 이후 '인천우체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준공 100년이 지난 2022년 현재도 원형을 거의 보존한 채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인천우체국 건물의 현재 모습.(사진촬영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우체국 건물의 현재 모습.(사진촬영 천영기 시민기자)

단순 공문 발송업무로 시작해 조선 거주 외국인 “우편 창구”로

1883년 12월 1일 인천 소재 일본영사관은 조선 내 일본인 우편 배송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 사는 일본인은 많지 않았다. 조선과 일본을 잇는 기선도 한달에 2대만 들어왔기 때문에 당시 영사관의 우편업무는 공문서 발송 정도에 머물렀다.

그러나 인천에 정착하는 일본인이 늘어나고, 인천을 경유해 서울로 향하는 해양 우편이 점차 늘었다. 일본영사관의 우편 업무는 단순 영사관 업무로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폭증했다.

당시 일제는 국가가 판매하는 엽서 이외 다른 엽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엽서를 보내는 수량은 늘어나는데 조선에선 국영 엽서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이에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상인들이 종이를 엽서 크기로 잘라 우표를 붙여 판매했는데, 일본 정부는 나가사키에 도착한 사제 엽서들을 ‘통용불가’처리하고 파기했다. 이 기록은 일본 역사 최초의 사제 엽서 판매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과 조선 사이 우편량 증가를 보여주는 일례다.

1884년 4월 일본은 늘어나는 우편량을 감당하려 영사관 건물 일부를 일본 우편국 청사로 사용했다, 일본 경성공사관에도 인천우편국 경성출장소가 세워졌다.

그러나 우편국 규모가 커지고 서울과 인천 각지에 우체통이 세워지자 오히려 조선에 살던 일본인 이외 서양인들도 일본 인천우편국을 사용하면서 우편량은 더 늘어났다.

우편국 규모가 커졌음에도 우편 처리 속도가 우편량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자, 일본은 1896년 12월 영사관 토지 내에 우편국 건물을 신축했다.

조선의 자력 우편사업을 무력화시킨 일본 우편국

일제와 별도로 조선 정부는 1884년 우정총국을 설치하고 우정총판에 홍영식을 임명하는 등 우편사업 근대화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나 우정총국은 업무를 시작한지 1개월이 지난 1884년 12월, 우정총판 홍영식이 갑신정변에 참가했다가 처형당하면서 폐쇄됐다.

조선 자체 우편망은 우정총국 폐쇄 10년이 지난 1895년 갑오개혁 시기 부활했다. 조선 정부는 서울, 인천에 우체사를 세우고 1898년엔 지방 각지에 임시우체사를 설치해 우체사 총 38곳을 뒀다.

자체 우편망을 갖춘 조선 정부는 현 중구 경동 위치에 인천우체사를 설치하고 일본 인천우편국에 사무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 전역 우편사업 장악을 염두에 둔 일본은 조선의 요구를 거부하고 우편사업을 계속했다.

1900년 우체사는 전보사와 통합해 ‘통신원’으로 개편됐다. 당시 대한제국(1897~1910년)의 우편사업은 각 군 단위에 우체지사를 세우고 누적 우편량이 80만통이 넘을 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1905년 4월 러일전쟁 전세가 일본에 유리하게 흘러가자,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영 통신사업을 몰수하는 ‘한일통신협정’을 대한제국 정부에 강제했다.

일본은 협정 이후 한달이 지난 1905년 5월 인천우체사, 전보사, 부평·강화·교동 우체지사를 강제 접수해 일본 인천우편국에 귀속시켰다. 해외우편·전보통신을 통제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는 을사조약의 준비작업이었다.

인천명승엽서에 나온 인천우편국 모습. (출처 천영기 시민기자의 개항장기행)
인천명승엽서에 나온 인천우편국 모습. (출처 천영기 시민기자의 개항장기행)

인천 갑문 설치 이후 부두 근처에 우편국 건물 신축

1918년 인천항에 1갑거(갑문)가 들어서고 항동 인근 바다가 매립됐다. 인천부 내 여러 물류회사, 우선회사들이 물류 수하가 쉬운 갑문 근처로 회사를 옮겼다. 우편국 또한 1922년 물류·우편 수요에 맞춰 항동으로 신축 이전했다.

1922년 12월 1일 일제는 새 인천우편국 건물을 착공하고 1923년 12월 8일 영업을 시작했다. 새 인천우편국 건물 설계는 조선총독부 체신국 영선계가 담당했다.

영선계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서양 고전 건축방식과 일본 건축방식을 혼합한 절충주의 건축양식으로 인천우편국을 설계했다. 

항동에 새로 지은 인천우편국은 화강암 기반에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이후 벽돌 표면에 모르타르를 바르고 페인트칠을 해 하얀 빛을 띄었다. 입구의 두 기둥을 크게 만들고 건물 밖으로 돌출시켜 도드라지게 보이는 시각 효과를 노렸다.

당시 일제 조선총독부 영선계는 돔 형태의 지붕 설계를 선호했다. 하지만 인천우편국은 콘크리트를 부어 편평하게 만든 슬래브 지붕 양식을 사용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 슬래브 지붕은 한국전쟁 당시 포격으로 한차례 무너져 1957년 점판암 재질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체했다.

해방 이후 ‘인천우체국’으로 명칭 변경...2019년까지 우편업무 수행

1923년 우편국은 항동 새 건물로 이주해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우편업무를 수행했다. 해방 이후 일본식 명칭 추방 운동으로 우편국을 ‘인천우체국’으로 바꿨다.

한국전쟁 당시 포격으로 인천우체국의 입구와 기둥, 지붕 일부가 파손됐지만 1957년 복구했다. 이때 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꿨다. 입구의 두 기둥 양식에도 다소 변화가 생겼다.

1982년 시는 인천우체국 건물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했다. 인천우체국은 유형문화재 지정 이후에도 2003년 3월 10일까지 시 중심 우체국으로 기능했다.

2003년 인천우체국이 연수구로 이전한 후 옛 인천우체국 건물은 중동우체국으로 쓰였다. 하지만 2019년 중동우체국도 중구 신흥동 정석빌딩으로 이전하면서 2019년부터 2022년 현재까지 3년간 비어있다.

시는 옛 인천우체국 건물의 소유권을 확보하고 복합 문화공간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행정절차를 진행중이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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