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근대 건축문화재기행① 옛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인천투데이=김지문 기자 |

<인천투데이>는 도시개발로 사라져가는 인천 내 근대건축물을 아카이빙하고 문화유산 가치를 시민에게 전달하고자 인천 근대 건축문화재 기행 특집을 진행한다. 개항·식민지·분단 시기의 애환을 간직한 인천의 건축물을 살펴보고 그 의의를 설명한다. <기자말>

옛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은 인천 중구 제물량로 218번길에 있다. 1888년 세워진 이 건물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이자 일제의 조선 침탈 상징물이다. 현재 인천아트플랫폼이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1885년 10월 세워진 일본우선주식회사는 조선에서 쌀·콩·명태·무명 등을 싼 가격에 사들여 청나라와 러시아, 일본 자국에 판매하는 중계 무역과 국제우편, 여객·화물운송 등 해운 전문 회사였다. 현 미쓰비시 그룹의 모태가 된 회사 중 하나다.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 (사진제공 인천아트플랫폼)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 (사진제공 인천아트플랫폼)

일본의 조선 해운업 장악 첨병...청일전쟁·러일전쟁엔 사령부 역할도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의 해운산업을 장악하고 독점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국 해운회사의 제물포(인천)~나가사키 항로 개설을 지원했다.

그러나 1883년 제물포 개항 당시 제물포의 물동량은 많지 않았다. 결국 일본 당국과 해운업체들은 경제성 부족을 이유로 정기 항로 개설을 미뤘다.

일본 해운업체의 인천 기점 정기항로 개설이 늦어진 가운데, 1883년 8월 영국계 해운회사 이화양행이 처음으로 상해~인천~부산~나가사키를 잇는 정기항로를 개설했다.

일본은 이화양행의 조선 해운업 진출을 경계해 1883년 10월 고베~나가사키~부산~인천을 잇는 항로를 개설했다. 일본은 수익성 없는 항로를 유지하기 위해 인천~나가사키 항로를 운항하는 업체에 연간 보조금 8800엔을 지급하기도 했다.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위치엔 원래 우편기선 미쓰비시회사 부산지점 인천출장소가 있었다. 1885년 10월 우편기선 미쓰비시회사가 공동운수회사를 합병해 '일본우선주식회사'로 탈바꿈했다.

이는 대규모 통합 해운회사를 신설해 서해 해운업을 장악하려는 일본 정부의 전략이었다.

미쓰비시회사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는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으로 승격됐다. 1888년 9월경 일본우선주식회사는 현재 위치에 인천지점 사무실과 창고, 사무원 사택 용도로 붉은 벽돌 건물을 지었다.

이후 일본우선주식회사는 1894년 조선의 국영 운송기업 ‘이운사’를 수탁해 관리하면서  조선 전역의 해운을 완전히 독점했다.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은 단순한 조선 해운산업 독점 뿐 아니라 실제 군사 침략의 전초기지 역할까지 수행했다.

일본우선주식회사는 일본이 일으킨 각종 침략전쟁에 동원할 군수 물자를 수송했다. 또한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을 일본군 병참사령부로 사용했다는 일설도 전해진다.

이는 당시 일본의 조선 경제 잠식과 무력 침략이 별개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일례다.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 (사진제공 인천아트플랫폼)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 (사진제공 인천아트플랫폼)

한국 최고(最古)의 서양식 건축물...설계결함으로 일부 목재 부식

1888년경 지어진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은 국내 현존하는 건축물 중 건축 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축물이다.

1891년 지어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건축물 약현성당보다 3년 먼저 완공된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서양식 건물이다.

건물 복원 당시 1888년 9월 공사를 완료했다는 상량문(대들보를 올릴 때 쓰는 축사)이 나와 준공시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상량문에 ‘명치 21년(1888년) 완공, 건축주 일본우선주식회사, 시공자 일본 효고현 전원상시(前原常市)’등의 문구가 남아 있어 건축을 담당한 인물이 일본인 '전원상시'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 외벽은 타일로 처리돼있다. 하지만 당시 기록과 사진을 종합해 보면 건물 전체가 붉은 벽돌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서양 건축양식을 모방해 출입구 상단에 그리스 도리아 양식 돌출부를 설치하고 수직 창문을 냈다.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은 지붕의 끝선보다 올림 장식을 높게 지은 설계결함이 있었다. 이 결함 때문에 비가 오면 지붕과 올림장식 사이에 물이 고이고 빠지지 않아 건물 천장의 목재가 썩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사무실 용도로 지어진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은 천장에 달린 보관함, 사무실 내부의 붙박이 서류철 등이 남아있었다. 19세기 말 일본 주식회사의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일본우선주식회사가 처음 이 건물을 지었을 당시 사무실 건물 양 옆에는 부설 창고와 주식회사 직원용 사택이 따로 붙어있었다. 하지만 사택의 위치는 현재 확인할 수 없고, 창고는 인천아트플랫폼 조성 공사로 철거됐다.

해방 후까지 항만 관련사 사무실로 쓰이다 인천아트플랫폼 건물로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1924년 조선우선주식회사가 건물을 사들여 인천출장소로 사용했다. 2년 뒤인 1926년 복도조 항만회사가 또다시 건물을 인수했다.

해방 이후에도 동화실업주식회사, 천신항업, 대흥공사 등 다양한 항만회사가 이 건물을 인수해 사무실로 사용했다.

2006년 문화재청은 이 건물을 국가등록문화재 248호로 지정했다. 이후 2009년부터 현재까지 인천아트플랫폼이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개화기 조선에서 곡물과 잡화를 수탈해 일본으로 보내던 일본우선주식회사는 이제 시민들의 문화생활 신장에 이바지하는 인천아트플랫폼의 일부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등록문화재는 국보, 보물 등과 다르게 보존, 관리 기준이 없어,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의 일부 부대시설이 철거되기도 했다.

개화기, 식민지 시기 역사의 면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인천 관내 근대건축물 관리 쳬계를 구체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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