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굴포천·직포·대표천으로 나눠 불러
예전엔 굴포천·직포·대표천으로 나눠 불러
  • 부평신문
  • 승인 2009.04.0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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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임동윤 선생의 ‘부평의 지명 이해’ <12> - 삼산동 굴포천
조선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가 계획했던 한강∼굴포천∼주안 갯골∼서해로 연결시키려는 운하계획(運河計劃)은 부평(富平)의 지명 생성과 변화에 엄청난 영향을 준 사건이다. 운하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공사 현장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공사에 동원될 인구(노동력)가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즉 운하계획 이전부터 자연적으로 발생한 마을이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노동력을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현재의 부평동 일대는 어느 정도 거주공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굴포천(堀浦川)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다음과 같다. 중종 때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김포현(金浦縣)에 굴포천[굴포(堀浦)·직포(直浦)·대교천(大橋川)]은 ‘현 동쪽 17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인천부(仁川府) 정항(井項: 십정동쪽인 원통천 방향)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흘러 고도강(孤島江)을 지나서 통진현 연미정(燕尾亭)으로 흘러든다. 강에 해마다 다리를 놓는데 그 비용이 적지 않았다’로 기록돼있다.

직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읍지(京畿邑誌)』,『부평군읍지(富平郡邑誌)』등에 “부평부 동쪽 10리에 있으며 적유산(狄踰山)에서 동쪽으로 흘러 양천현(陽川縣) 북포(北浦)로 유입된다”고 기록돼있다. 대교천은 “부평부 동쪽 7리에 있으며 원적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직포를 거쳐 김포군 굴포(掘浦)로 들어간다”로 기록돼있다.
『한국지명총람 17』김포군 동양리에 ‘굴포천’은 ‘동양리 앞을 흐르는 내’이고, ‘옛날 인공으로 뚫었음’으로 기록돼있다. 『지명유래집』은 ‘계양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연미정을 지나 한강으로 유입한다’, 『부평사』는 ‘부평동 철마산(201m)에서 발원해 북동쪽으로 흘러 김포군 고촌면 전호리 평야를 지나 신곡리 경계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인천의 대표적 하천이다’고 기록돼있다.

위의 기록들을 종합하고 부평부(富平府) 지도(1842~1843년), 일제 강점기(1918년)에 발행된 1/50,000 지형도와 1970년에 발행된 1/25,000 지형도를 비교해보면 현 김포 인터체인지 근처에 있는 판다리(판개다리·팽개다리)에서 한강으로 유입되는 북쪽까지를 굴포(掘浦), 목숙교에서 한다리(大橋)를 거쳐 판다리까지를 직포라고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부평군읍지』에 ‘대교, 대교천은 직포에 있다’고 했다. 즉, 고종 때(1884) 세곡미를 운반하기 위해 한다리를 가설한 후 ‘한다리개(大橋川)’라고 불러왔다. 구한말에는 직포보다는 한다리개를 더 많이 사용했다. 다시 말하면 직포와 한다리개는 같은 하천이고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불렀던 지명인 것이다.

현재는 속칭 ‘부평’ 일대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굴포천·직포·대교천 등으로 분류해서 부르지 않고 부평구에서 북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수로) 모두를 대표적으로 ‘굴포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부평부읍지』에 ‘큰 뜰 가운데 우측에 배바위가 있고 좌측에 장도지(장제)가 있고 이어서 목숙교가 있다.(大野中右有大石名曰船巖左有大池名曰長陶池又有長提連??橋)’, 『부평군읍지』에는 ‘삼강을 장제(大野中右有大石名曰船巖左三江曰長堤)’라고 기록돼있다. 그리고 1/50,000지형도를 참고하면 계양산 남쪽의 부평을 흐르는 모든 하천은 삼산동을 거쳐 목숙교를 거쳐 직포로 유입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위 기록들을 참고하면 장두못(장제)에 목숙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배바위는 장두못에 있는 큰 바위로서 바위 구멍으로 배가 드나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목숙교는 『부평부읍지』부터 기재돼있다. 또한 지도상에도 표시돼있다. 그것은 굴포천을 건너는 목숙교는 한다리와 더불어 현재의 부천과 연결되는 중요한 다리이기 때문이다. 부평을 흐르는 하천들이 직포로 유입되는데, 이곳에서 갑자기 좁아져 큰 비가 오면 언제나 범람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점을 목수통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1/50,000 지형도에 장두못·삼강·목숙교·장천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장두못은 말 그대로 큰 그릇과 같은 못이다. 현재는 장두못과 목숙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삼강과 장천은 알 수 있다. 현재는 장두못·삼강·목숙교·장천은 모두 사라진 지명이다.

새 개울은 서부간선수로 공사를 하면서 경인고속도로 주변의 농수로로 이용하기 위해 목숙교 쪽으로 유입하도록 판 개울로 짐작된다. 그리고 대부 뚝(방죽 뚝)은 서부간선수로의 뚝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임동윤·세일고 지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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