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임동윤 선생의 ‘부평의 지명 이해’<11> - 삼산동

최근 삼산동 일대가 아파트 단지와 상권이 조성되면서 부평구의 중심지가 부평역로터리 주변에서 삼산동 일대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부평(삼산동)과 부천(상동·중동)으로 이어지는 시가지의 연담화가 되면서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삼산동의 동(洞)명 유래는 애매한 점이 있다. 1914년 부천군 부내면 후정리, 1940년 삼립정(三笠町), 1946년 삼산동(三山洞)으로 변천했다.

삼산은 청천동의 김(금)산, 갈산동의 갈산, 삼산동의 영성산(염성산)의 산들을 지칭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립(三笠)은 일제의 전함 삼립환(三笠丸·미가사마루)호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삼산동의 동명은 일제의 잔재라는 의견이 있다. 즉 삼립정(三笠町)을 광복이후 우리식 동명으로 개정할 때 삼산(三山)으로 개칭했다는 것이다.

1899년에 발행된 『부평군읍지』에 ‘삼강을 장제라고 한다(大野中右有大石名曰船巖左三江曰長堤)’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삼강은 원통천·청천·석천을 말한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자를 무척 좋아한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뿌리 깊게 내려있는 불교의 영향 때문이다.

즉 삼강이 있듯이 ‘부평’의 토박이들이 살고 있던 마을 중 갈산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이 거주 공간이 부족해 주변으로 확산되는 과정 중 이들 세 개의 산 주변으로 이주해 마을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세 개의 산이 연속적으로 있기 때문에 동명을 삼산동으로 정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삼산동의 원 마을은 후정리(뒷우물)다. 뒷우물은 갈산동의 ‘갈우’마을 뒤에 샘물이 있어 이곳 사람들이 능선을 넘어서 이곳에서 물을 길러갔다. 그 뒤 갈우마을에서 이전해온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했고, 마을 이름을 ‘뒷우물’마을이라고 불렀다. 이후 우물을 크게 판 뒤 큰 마을이 형성됐고 마을 이름을 한자화해 후정리라 한 것이다. 또한 후정리는 본동 또는 1구라고 했다. 현재의 삼산동은 동명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삼산동의 원 마을의 이름인 후정동으로 개칭하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영성산(靈成山) 또는 염성산(廉成山)은 『부평군읍지』지도에는 영성산(靈成山), 『경기읍지』, 『부평부읍지』지도에는 염성산(廉成山)으로 나온다. 영성산은 “신령의 영험한 기운이 이곳에 있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삼산동 토박이인 전병운(76)옹은 염성산은 “이곳에 염(廉)씨 성과 성(成)씨 성의 종산이 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1970년에 발행한 1/25,000 지형도에까지 표시돼있으나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어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영성산’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으며, 현재는 ‘염성’보다는 ‘영성’이란 지명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모르고 있다.

1920년경부터 영성산(염성산) 밑에 새로운 마을이 형성됐고 이 마을을 ‘영성리’라 했다가 ‘영성미’가 됐다. 또한 영성산 끝머리에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 상부가 부서져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벼락을 맞아 그렇게 됐다고 해 ‘벼락바위’라고 했다. 그리고 벼락바위가 마을 이름이 됐다. 흙더미(흙터머지)는 서부간선수로 제방을 쌓을 때 갈산과 영성산(염성산)의 흙을 사용했는데, 사용하고 남은 흙이 이곳에 방치돼있었고,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흙더미’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즉 영성미, 벼락바위, 흙더미(흙터머지) 세 곳에 취락이 형성됐고 이것이 하나의 마을로 형성된 것이다. 또한 후정리(본동 또는 1구) 다음에 생긴 마을이기 때문에 신촌, 또는 2구라고 했다. 현재는 모두 사라진 지명이고 도로명에만 영성미를 사용하고 있다.

영성산(염성산) 남쪽 평야지대는 대부분 저습지로 상습침수 지역이었다. 홍수(1925)이후 일본인들이 땅을 저렴하게 매입했고 서부간선수로 공사를 했다. 이곳은 ‘천일’이라는 일본인이 소유했고 농장(방죽)이름을 천일농장(방죽)이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이곳에서 소작농이 됐고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게 됐다.

그 때의 상황을 부평동 토박이인 박승규(78)옹과 갈산동 토박이인 이덕규(71)옹은 기억하고 있었다. 광복 이후 전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이곳을 고니시농장(방죽)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바로 앞마을이 고니시마을이었기 때문에 천일농장과 구분하지 않고 고니시농장으로 통일해서 부르는 것이 이곳을 인지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 외 지명들로는 차씨방죽, 매뜰, 뒷들 등이 있다.

                                                                    /임동윤·세일고 지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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