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임동윤 선생의 ‘부평의 지명 이해’<1>

속칭 ‘부평(富平)’의 지명 변동에 대한 단상

연재를 시작하며 - 임동윤 선생의 ‘부평의 지명 이해’

‘부평’이라는 지명이 역사적으로 처음 등장한 시기는 고려 충선왕 2년(1310)이다. 이 시기의 ‘부평부(富平府)’는 현재의 경기도 김포와 안산, 서울의 일부분(양천) 그리고 부평구, 계양구, 서구를 포함하는 아주 넓은 지역이었다. 이후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행정체제의 변화만 있었을 뿐 ‘부평(富平)’이라는 지명은 계속 사용됐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부(府), 군(郡), 면(面)이 통폐합되면서 ‘부평’이라는 지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부평’의 ‘부(富)’와 ‘인천(仁川)’의 ‘천(川)’자가 조합된 새로운 행정구역 ‘부천군(富川郡)’이라는 지명이 태어났다. 1940년 4월 1일 ‘부천군’ 중 현재의 부평구, 계양구, 서구는 ‘인천부(仁川府)’에 편입됐고, ‘부평출장소’가 현재의 대림아파트 103동 자리에 잠시 있었다.

이 ‘부평출장소’의 ‘부평’이 공식적으로 부활된 지명이다. 즉, 1310년부터 약 605년 사용됐던  ‘부평(富平)’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지 27년 만에 부활된 것이다. 그리고 광복이후 1946년 1월 1일 일본식 정(町)을 한국식 동(洞)으로 개칭하면서 ‘부평동(富平洞)’이 공식 명칭으로 되살아났다. 또한 1995년 3월 1일 ‘북구’가 ‘계양구’와 ‘부평구’로 분구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속칭 ‘부평(富平)’이라는 지명은 지칭하는 범위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면서 점점 좁아지고 있다. 부평구에 거주하는 대략 50대 이후 기성세대는 부평구와 계양구 그리고 서구 일부분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30대 미만 세대는 현재의 부평구가 곧 ‘부평’과 같은 의미로 인식하고 있다.

이쯤에서 다시 ‘지명’의 의미를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자연물, 인공물, 기타로 말미암아 생긴 지역성, 대중성을 지닌 땅의 이름이다’라고 정의돼 있다. 또한 ‘지명유래집’에는 ‘자연, 전통신앙, 역사, 경제생활, 행정제도 변화, 전설·설화 등에 의해서 유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라고 돼있다. 지명은 항상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1934년경 부평역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부평역 주변은 차차 인가가 형성됐다. 1939년경 현재의 ‘캠프마켓(부평미군부대’과 그 주변 일대에 일제의 병참기지인 ‘조병창’ 공사가 시작되면서 조병창에 납품하는 공장들이 입주하기 시작했고 또한 전국에서 올라온 노동자들도 거주지를 찾아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일본인들은 교통이 편리한 부평역 주변(윗마을)에 상가를 형성하면서 거주지를 점점 넓혀갔고, 조선인들은 부평역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아랫마을)인 현재 시장로터리 직전 ‘시장길’ 주변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예전부터 거주하고는 있었지만 이때부터 부평역을 중심으로 토지이용의 변화가 시작됐고, 그에 따라 지명도 생성·변화·소멸됐다. 

현 부평구에 남아 있는 ‘부평’의 지명도 주민들에 의해서 의미가 부여되면서 세대에 따라서 변화, 소멸됐고 또는 새롭게 생성되기도 했다. 특히 현 부평구에서 기성세대가 알고 있는 많은 지명들은 1939년 이후 부평역 일대의 토지이용 변화와 관련된 지명들이다.

지명은 과거에 거주했던 주민들과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다. 그리고 생활 모습이 투영된 지명에 의해서 현재 부평구에 뿌리내리고 있는 우리들 생활의 단면을 거울처럼 볼 수 있다.

또한 앞으로 삶의 터전인 ‘부평구’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부평구의 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단초가 될 것이다.


부평1동과 생활공간

최근 ‘랜드마크’라는 용어가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현 ‘부평’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과 타 지역 사람들이 ‘부평’하면 제일먼저 연상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마 ‘부평역’을 1순위로 동의하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조금 과장돼있는 것 같지만 최근 자료에 의하면 부평역의 하루 유동인구가 약 5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경인선은 1899년에 개통됐지만 부평역사는 이듬해인 1900년에 건축됐다. 그 당시의 부평역을 묘사한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평역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넓은 벌판이 까마득하게 펼쳐있고 갈대벌판 가운데 드문드문 논이 있을 뿐…<생략>’ 이러한 표현으로 보아 19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부평역 주변은 한적한 곳도 아닌 습지와 황무지만 펼쳐진 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34년 부평역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부평역 주변은 토지이용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고 인가가 들어선 것이다. 1930년대 후반 들어 인천항 주변은 토지 이용이 포화되면서 토지가 부족했고, 그에 따라 인천항을 대신할 토지를 찾았다. 부평은 대륙(중국)으로 연결되는 지리적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일제의 군수기지가 들어서는 데 최적의 후보가 된 것이다.

또한 부평역은 서울과 인천을 연결해주는 요지이고, 주변의 넓은 평야(부평평야)는 식량 보급 기지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평역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부평역 주변은 일본인들이 점유해 마을이 형성됐고 일본인들은 주로 장사를 했다. 조선인들은 ‘부평역’을 ‘동소정(同所井)역’이라고 불렀고, 이 마을을 ‘동소정이’ 또는 ‘동수재이’라고 불렀다. 조선인들은 이미 현재의 시장로터리 가기 전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마을이 원 ‘동소정’이고, 일본인 거주지보다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하촌(下村, 아랫마을)이라 했다. 그리고 일본인 거주지를 ‘동수재이, 윗마을’이라 했다.

1939년부터 일본 육군의 병참기지인 ‘조병창’이 - 해방 후 미8군 소속의 에스캄이 들어섰고, 현재는 캠프마켓이 있다. - 부평동에 입지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군수납품업체인 ‘홍중(弘中)’- 이 공장이 부평 최초 공장인 ‘고주파 중공업’으로 추측된다. 또한 1943년에 ‘삼릉(三菱)’에 인수됐다. - 들어서면서 부평역 주변은 대규모 건축·토목 사업이 시작됐다. 전국에서 토지를 잃은 농민과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부평으로 유입됐고 이들이 정착하면서 부평역 일대는 거주지로 변화됐고 또한 이 거주지는 외곽지역으로 확산됐다.

한마디로 부평역 주변은 건축·토목 관련 외지인 노동자와 그 노동자들의 숙식 해결을 위해 장사하는 밥집, 콩나물 집, 두부 집 등 장사꾼들이 모여 있는 집단 거주지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부평은 1940년 인천부(仁川府)에 편입되면서 ‘소화 토지구획정리(현 부평1지구)’ 사업이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1941년 조병창 확장 공사와 부평역 로터리 확장 공사를 시작했다. 이 공사로 인해 부평역 일대는 군수기지의 기능이 더욱 강화됐고 또한 거주민들(조선인, 일본인)의 주거지와 상권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즉, 현재의 ‘부평로’와 그 주변 토지이용 상태가 그 당시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평1동 토박이인 김승복(53)씨는 “초등학교 다닐 때 부평역 로터리는 학교 운동장보다 더 넓어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학교에서 꽃씨를 가져오라고 하면 로터리 안 꽃들 씨앗을 따서 가지고 갔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부평역 로터리 확장 공사로 ‘동수재이’의 일본인들은 새롭게 터를 만들고 신식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이곳이 현재의 명신당 맞은편이다. 광복이후 부평의 ‘용동’이라는 뜻의 ‘신용동(新龍洞)’이라고 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새로 조성한 지역의 임대료가 높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토지 가격이 저렴한 ‘수도사거리’ 주변으로 이전해 상권을 형성했다. 이 상권들이 현재의 부평동의 중심 상권이 되고 있다. ‘수돗길’은 구한말(1906) 인천의 개항으로 외국인들의 식수난을 해결하고자 건설된 수도관 중 부평을 통과하는 부분을 관리하고자 만든 도로이고, ‘수도사거리’는 현재 CJ방송국 사거리를 말한다.

1941년 조병창 확장 공사를 5명의 일본인들이 했는데, 그중 ‘다다구미’가 현재 롯데백화점 주차장 옆에 현장사무소를 만들기 위해 땅을 평평하게 공사했다. 1918년 지형도를 보면 이곳에 자그마한 동산이 있었고 주변은 논과 밭이 전부였다. 또한 현재 롯데백화점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은 ‘원통천’에 해당된다. 부평1동 토박이인 이상윤(46)씨에 의하면 비가 많이 올 때 물에 잠기지 않은 부분이 북인천우체국 앞길이다.

공사하면서 나온 자갈들을 현재의 파레스어학원 주변에 깔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 집이 없던 조선인들 노동자들이 마을을 형성했다. 이 마을을 ‘자가밭말’이라고 한다. 광복이후 미8군이 ‘조병창’에 들어서면서 그 주변은 미군을 상대로 하는 장사꾼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다다구미 현장사무소가 있던 곳은 판잣집과 천막촌 등 무허가 집들이 자리 잡았다. 이곳을 ‘해방촌’이라고 했다. 이곳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부평의 대표적인 집창촌이었으며, 지금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임동윤·세일고등학교 지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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