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임동윤 선생의 ‘부평의 지명 이해’ <6> - 일신·구산동

구한말까지 속칭 ‘부평’(현 부평구와 계양구)이 ‘인천’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생활·문화권을 형성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현 부평구와 계양구에 펼쳐있는 산지들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부평도호부의 진산은 계양산(395m)으로 한남정맥에 속하고 있다. 한남정맥의 산줄기는 현재의 부평구와 계양구 일대에 와서 소래산(279m) - 거마산(205.6m) - 비루고개[성현(星峴)] - 금마산(201m) - 만월산(주안산·원통산)(187m) - 원통이고개(128m) - 장고개 - 원적산(165m) - 안하지고개 - 원적산(철마산 227m) - 경명현 - 계양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산줄기는 구한말까지 인천도호부와 부평도호부의 자연적 경계가 되었고 또한 생활권이 분리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산줄기는 그림과 같이 현 부평구와 계양구를 ‘C’자형으로 감싸고 있어 현 부평구와 계양구를 제외한 인천보다는 서울로 향해 열려있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한양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를 이용하려면 경명현(景明峴)·구십현(九十峴)·성현(星峴)의 고갯길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 중 경명현은 가장 빠른 길이었다. 계양산 서쪽 현 계산동에서 서구 공촌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징메이고개(수주고개·경명현고개)’라 한다. ‘징메이’는 고려시대 이곳에서 매를 키우고 징발했기 때문에 붙여졌고, ‘수주(樹州)’는 고려 초 도호부였던 계양구 목상동이다. 계양산 남쪽인 현재의 계산동으로 도호부가 이전한 후에도 그 지명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 지명을 붙인 고개이다.

또한 통진(通津)의 조강(祖江)을 거쳐 개성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즉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한양에서 부평도호부를 거쳐 중국으로 가는 뱃길을 연결해주는 고개였으며, 사신과 상인들이 이 고개로 자주 다녔던 것이다. 또한 이곳을 ‘백인(百人)고개’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이곳에 도둑들이 자주 출몰했기 때문이고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야만 이곳을 넘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아지고개[안아지(安阿只)·안하지(雁下池)·내하지(內河池)·구십현(九十峴)]는 새별이(효성동)를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장마 때면 천마산(天馬山)과 원적산(元積山) 사이에 물웅덩이가 만들어졌고, 이곳에 기러기가 내려와 있던 곳이라 하여 ‘안하지(雁下池)’라고 부르게 된 것이 ‘안아지’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구한말 때 세미(稅米)를 한양으로 운반하면서 이 고개를 통과하게 됐고 고개 주변 동정도 살필 겸 주막에 쉬어 갔는데, 이 주막의 주모 이름이 안아지(安阿只)여서 ‘안아지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내하지(內河池)는 김안노가 굴포운하를 원통현에서 실패하고 다시 이 고개를 뚫으면서 고개 밑에 연못을 만들어져 내하지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평’의 옛 지도에는 모두 ‘구십현(九十峴)’으로 기록돼있다. 이성계가 새 도읍지를 물색할 때 골짜기가 100개가 되어야 하는데, 이 골짜기가 구십 번째가 되므로 구십현이라 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이 고개 역시 뱃길과 육로를 연결해주는 통로였으며, 당시에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개였음을 알 수 있다. 현 지형도에는 ‘안하지’로 표기돼있고, 도로명은 ‘아나지길’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부르기 쉽게 바뀐 것이다.

비루고개는 부평도호부의 고지도뿐만 아니라 현 지형도에도 모두 성현(星峴)으로 표기돼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비루고개는 한양에서 중국까지 사신들이 지나가는 길이었다.

부평도호부에서 인천도호부로 가는 통로 첫 번째 고개가 ‘별리고개[성현(星峴)]’이고, 문학산과 연경산 사이에 있는 고개가 ‘사모지고개[삼호현(三呼峴)]’이다. 이형석은 <인천의 땅이름>에서 이곳이 가족들과 이별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이별고개가 되었고, ‘비루고개[별리현(別離峴)]’, ‘별고개’, ‘성현(星峴)’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이후 중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육로보다는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고 사신들과 그 수행원, 그리고 장사하는 이들 모두 이 통로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부평도호부와 인천도호부를 거쳐 서해로 가는 뱃길을 이용하기 위한 통로는 계산동의 경명현, 효성동의 구십현(안하지), 일신동의 성현이고 그 중 ‘성현’은 위험(도둑)이 가장 적은 곳이었기 때문에 사신(使臣)들과 상인(商人)들이 주로 이용했던 통로(通路)였고 또한 가족들과 이별하는 장소였다.

그것은 현재도 그 지명이 변하지 않은 채 사용되고 있으며, 조선시대 부평도호부 고지도에 빠짐없이 기록돼있는 것으로 보아 추정해 볼 수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현재 일신동에서 넘어가는 성현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가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장수동 방향(비루고개 길)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신동의 항동(航洞)(굴)은 풍수의 영향을 받은 지명이다. 부개산 줄기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형국이 배와 같아서 항동이라 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1/50,000 지형도를 참고하면 이곳의 마을은 과거부터 형성된 자연 부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 군수기지로 수용되면서 주민들은 항굴 주변에 흩어져 정착했고 광복이후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이곳에 새롭게 정착한 것이다. 항동을 포함한 나머지 지역 일대에 인구가 증가하고 주택 단지가 들어서면서 1982년 이곳 일대가 새로운 곳이라는 뜻으로 일신동(日新洞)이라고 했다.

구산리(九山里)는 거마산 능선 모양이 마치 거북의 등성이와 같이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구산리(龜山里)라고 했다. 1914년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구산리(九山里)로 오기된 것이 현재의 구산동(九山洞)이 된 것이다.
                                                                           /임동윤·세일고등학교 지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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