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임동윤 선생의 ‘부평의 지명 이해’<4>

부평5·6동 지명과 생활공간

‘인천 토지구획정리사업 연혁집’과 일제강점기 지형도(1918년)를 참고하면 19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부평동 일대는 부평역(하촌)만 마을이 형성됐을 뿐 다른 지역은 논과 밭 그리고 저습지였다. 부평 일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하천정비 사업을 했고 그에 따라 범람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을축년(1925) 대홍수로 부평 일대는 범람의 피해가 엄청났고, 범람의 피해로 인해 하천 주변 토지는 헐값이었다. 1930년대 초반 일본인 고니시는 현재 부평중학교 앞 주변 땅을 매입해 농장(벼농사)과 방죽을 만들었다. 방죽을 만들면서 제방이 형성됐고 그 제방 바깥쪽에 집들(소작농)이 들어섰다.

이것이 ‘고니시 농장’, ‘고니시 방죽’, ‘고니시 마을’이다. 그러나 방죽의 수원(水源)은 빗물이었기 때문에 비가오지 않으면 방죽은 말라버렸고 농장은 한해(旱害)의 피해가 컸다. 소작농(조선인)들은 연속적인 한해의 피해를 견디지 못해 소작을 포기하면서 마을을 떠났고 마을은 폐촌이 됐다. 이후 이곳은 집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부평동 토박이인 박승규(73)옹은 “고니시 농장이 없어진 뒤에도 타지 사람들이 - 주로 한(韓)씨 - 이곳에 모여 마을은 형성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현재 이곳을 ‘한울길’이라고 한다.

광복이후 부평은 고향을 떠나온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고, 특히 현 삼산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형성된 농장이 -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1930년대 후반 일본인 ‘천일’이 농장과 방죽을 만들었다 - 있었기 때문에 주로 농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남쪽에 마을이 형성됐다. 이곳이 현재 ‘고니시 마을’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원 고니시 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400여m 위에 있다. 이곳에 마을과 마을명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타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이곳을 빠르게 인지하기 위해서 과거 사용했던 ‘고니시 마을’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민들은 이곳 ‘고니시 마을’을 발음하기 쉬운 ‘곤샛말’, ‘고니새 마을’, ‘고니 마을’ 등으로 불렀고, 1953년 마을 이름이 일본인의 이름이기 때문에 주민들에 의해서 다시 새롭게 정착하는 주민들에게 복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신복동’으로 바뀌었다.

부평동 토박이인 심현민(42)씨는 “어렸을 적에 현 삼산동 일대가 논이었고, 이곳에 고니· 백로 등 새가 많아 이 마을을 고니 마을로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했다. 현재 ‘신복 노인정’ 앞에는 ‘고니시 마을’의 유래에 관한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부평동 일대의 원 지명은 동소정면 대정리다. 대정리는 큰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고 ‘부평’일대는 우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물을 구하기 쉬운 곳에는 거의 취락이 발달하기 때문에 ‘큰우물’ 주변에 발달하고 있는 취락이 원 부평동 일대의 취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 시장로터리 주변의 대정길이 있는 주변이 (원)하촌이다.

광복이후 부평시장이 형성되면서 (원)하촌은 시장에 편입됐고 주민들은 대부분 현 부흥초등학교 일대로 이주했다. 원주민이 거주했던 (원)하촌이 사라졌고 새롭게 이주한 곳이 하촌이 됐다. 그리고 현 부평동의 주민들은 대부분 광복이후 정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현재 부평 일대의 토박이 개념은 그 다음 세대들까지도 지칭하므로 부평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토박이들은 부흥초등학교 일대를 ‘하촌’이라고 알고 있다.

신부동(新富洞)은 부흥초등학교 북쪽 일대를 말한다. 1970년대 초반 집이 없던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면서 ‘부를 이루는 마을’이라는 뜻의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부평동 일대는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섬’처럼 여기저기에 마을이 형성하면서 기존의 동네와 합쳐진 것이다.

부평6동은 구릉지가 많기 때문에 마을도 대부분 1970년대 이후에 형성됐다. 1940년대 초반 부평역 뒤(남부역)에 철도 공무원의 관사를 지었고, 관사 주변에 마을이 형성됐다. 그리고 관사 옆의 동산에 ‘당집’이 있었다. 이곳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를 매년 지내는 곳이다. 1940년 부평동 일대가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일본인들은 이곳 ‘당집’에 ‘신사(神社)’를 짓고 강제로 참배시켰다고 한다.

                                                                     /임동윤ㆍ세일고등학교 지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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