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임동윤 선생의 ‘부평의 지명 이해’ <10> - 갈산동

역사적으로 발달한 취락은 세대 간 교체에 따라 주민들 구성만 바뀔 뿐이고,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지명은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인 생명력을 갖고 있다. 현재도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부평’ 일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달한 촌락인 갈산·삼산동 등도 역사적으로 형성된 지명이 계속 전달돼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사용되고 있다. 『여지도서』,『경기읍지』,『부평군읍지』등에 기재돼있는 인구수로 추정해 볼 때 갈산동, 삼산동, 작전·서운동은 계산동 일대 다음으로 인구밀집지역이었다. 갈산동 일대가 인구밀도가 높은 것은 농업과 연관성이 있다. 삼산동과 서운동은 벼농사를 위주로 했고, 갈산동과 작전동은 밭농사를 주로 했던 지역이다.

<한국지명총람 18>에서 갈산동은 갈우(葛隅)·갈울·갈월·갈산(도당산)이라 했다. ‘갈우(葛隅)’는 칡산의 모퉁이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명유래지 - 부평의 땅이름>에는 “이 동산 동남쪽 산기슭에 병자호란을 전후해 세종대왕 넷째 아드님 임영대군 후손이 자리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다”라고 돼있다. 그리고 『부평부읍지』, 『경기읍지』와 『부평군읍지』지도에는 모두 ‘갈우(葛隅)’로 표기돼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갈우(葛隅)’가 원래 마을 지명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갈산동 토박이인 이덕규(71)옹은 ‘갈우’보다는 ‘갈월’, ‘갈울’로 알고 있었고 그 중 ‘갈월’의 인지도가 가장 높았다고 회고했다. ‘갈월(葛月)’은 칡덩굴이 우거진 동산(갈산)에 비추는 밝은 달의 야경이 장관을 이루었기 때문에 갈산명월(葛山明月)이라 했고, 이것이 축약돼서 ‘갈월’이라 했다고 한다. ‘갈울’은 ‘갈월’을 쉽게 발음하기 위해 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갈산’은 칡이 많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칡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갈산과 관련된 지명은 많이 발견된다. 현재, 갈산은 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정상에는 부평정수장이 있다. 또한 갈산 정상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도당산으로도 불렀다.

‘새갈’, ‘신갈’은 갈우마을 북쪽에 새롭게 생긴 갈산 마을이다. 1943년경 ‘국방도로(경인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갈산의 북쪽 줄기 흙을 이용하면서 이곳은 평지가 조성됐다. 광복이후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평지로 조성된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진 것이다. 부평 5동 토박이인 박승규(78)옹은 국방도로 건설 현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평일대의 상습침수지역은 황어천(청천)과 원통천이 합류되는 지점인 현 부평구청 주변이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김포에서 부평까지 이어지는 서부간선수로를 건설하는 계기가 됐다. 황어천과 원통천의 하폭을 넓히는 등 하천을 정비했고, 곡선수로를 직선수로로 만들었다. 이곳을 굴착해 정비한 수로가 서부간선수로이고, 또한 직포(굴포천)와 연결됐다. 현재는 이 모든 하천을 굴포천으로 부른다.

서부간선수로를 건설하면서 합류되는 지점에 크고 작은 다리가 여러 개 있었다고 한다. 이 다리 중 청천에서 굴포천으로 유입되던 곳에 가설된 다리는 이곳 주민들이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마장뜰이 고지대이고 억새만 무성한 곳이었기 때문에 토지이용가치가 없어 통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다리는 그대로 방치됐으며, 또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가 삭아 ‘삭은다리’가 된 것이다. 주민들이 ‘삭은다리’를 발음되는 대로 부르면서 ‘사근다리’가 된 것이다.

1941년 조병창 확장 공사를 계기로 부평역로타리가 공사장이 되면서 그 주변에서 장사를 하던 토박이 상인뿐만 아니라, 김포 등지에서 부평로(당시 부평과 김포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길)를 따라 부평역 일대로 유입됐던 김포 상인들도 갈 곳이 없어졌다. 부평 토박이 상인들은 주로 수도사거리에 모여서 새로운 상권을 형성했고, 1943년경부터 김포 등지에서 유입된 상인들이 이곳 주변(현 대동아파트 105동 주변)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했고, 또한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이곳에 마을과 상권이 형성된 것은 이곳이 김포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부평로)였기 때문에 이주에 편리했고, 또한 일본인 상인들과 부평의 토박이 상권의 저항을 받지 않는 유리한 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평에 먼저 정착한 사람들이 가게를 열면서 마을을 형성해 새로 정착할 터전을 제공해주었던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 마을들을 ‘사근다리’라고 한다.

원통천과 청천이 아랫신트리(현 부평구청) 부근에서 합류해 서부간선수로로 유입하면서 장마철이 되면 유량이 많아져 서부간선수로의 제방이 붕괴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사근다리 옆에 수위 조절용 다리를 건설했다. 이 다리를 여수토교(餘水吐橋)라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고 다만 원통천과 청천이 합류되는 지점이라고 알려져 있다.
                                                                            /임동윤·세일고 지리교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