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임동윤 선생의 ‘부평의 지명 이해’<3>

부평4동 지명과 생활공간

부평동과 그 주변 지역에는 ‘신(新)’과 ‘사택(社宅)’이 붙은 지명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신(新)’과 ‘사택(社宅)’이 붙여진 모든 촌락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연발생적 촌락보다는 일제 강점기 이후에 마을이 형성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트리’와 ‘지젤사택’도 그 중 하나다.

을축년(1925) 대홍수는 인명과 재산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 홍수로 유명하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전국에서 647명이 목숨을 잃었고, 쓸려 내려간 집이 6363호, 무너진 집이 1만 7045호, 물에 잠긴 집이 4만 6813호나 됐다고 한다. 1985년에도 부평 일대는 범람이 돼 현재의 산곡동 롯데마트 부평점까지 물에 잠겼다. 과거의 기록이나 1960년대 지형도를 참고하면 현재의 부평구청 주변은 청천·원통천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항상 침수가 되는 저습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을축년(1925) 홍수 이후 현재의 부평구청 주변(서부간선수로)은 범람에 대비하기 위해 수로를 정비하면서 수로를 깊게 팠으며, 거기서 나온 흙들로 제방이 높아져 주변은 안전한 지대가 됐다.

따라서 그 주변은 취락이 입지할 만한 좋은 조건(피수대)을 갖춘 것이다. 1942년경부터 토지를 잃은 전국의 농민·노동자들이 모여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삶의 터전이라고 여겼다. 이곳의 마을 이름이 새터리(新基里, 新垈里)가 됐고 이것이 ‘신트리’로 변음된 것이다.

부평동 토박이 박승규(73)옹은 “수로를 정비하고 제방을 쌓으면서 나온 흙은 물기가 많았고 또한 비가 왔다 하면 물이 잘 빠지지 않아 질퍽거렸다. 이곳을 지나 집에 도착하면 신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발의 흙을 털었기’ 때문에 이곳을 신트리라고 한다”고 했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 현재의 신트리공원에 마을이 형성됐는데 ‘신트리’와 구별하기 위해 이곳을 ‘아랫 신트리’라고 불렀다.

1943년 ‘디젤 자동차’ 부평공장이 현 부평고등학교와 부평중학교 일대에 입주하기 위해 터를 닦고 공장 앞에 사택을 먼저 지었다. 이곳을 ‘지젤사택’이라고 한다. 공장이 완공되지 못한 상태에서 광복이 됐고 집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한국전쟁 이후 주민들에 의해서 이곳은 ‘지절방(志節坊)’으로 개칭됐다.

부평동 토박이인 심현민(42)씨는 이곳을 친구들끼리 ‘사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기성세대들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공식적인 지명(부평○동)은 지칭하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서로 인지하기 어렵게 느끼고 있다. 반면 과거에 자신들이 사용했던 지명들을 사용하는 것이 일정한 장소를 인지하는 데 더 편리하게 느끼고 있다. 즉 ‘사택이’ 앞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이 장소를 인지하는 데 더 편리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1948년경 부평동 일대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많았고 또한 주변에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시장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당시의 공설운동장은 시장이 형성되기 위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시장이 부평의 최초 시장인 ‘공설시장’이다.

그러나 공설시장은 부평역과 마을이 형성된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시장으로서 적합하지 못해 1949년에 ‘부평시장’이 세워지면서 상권이 공설시장에서 부평시장으로 옮겨오면서 공설시장은 사라졌다.

그리고 1952년에 ‘새시장’, ‘자유시장’이 형성되고 부평의 상권이 이곳에 집중되면서 1962년에 이곳을 모두 합해 ‘부평시장’으로 통일된 것이다. 이어서 1965년에 ‘부흥시장’이 청과물시장으로 세워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부평역에서부터 부평시장·부흥시장까지 연결되는 상업지역이 형성됐고 또한 지하상권까지 형성돼 부평상권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임동윤·세일고등학교 지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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