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임동윤 선생의 ‘부평의 지명 이해’<2>

부평2·3동 지명과 생활공간

속칭 ‘부평’의 역사뿐만 아니라 생활 공간상의 변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건은 ‘굴포운하’ 공사였다. 그리고 속칭 ‘부평’의 지명 유래를 찾고자 할 때도 운하 공사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천 관련 지명들은 삼산동의 지명들에서 언급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굴포’와 관련된 일부 지명인 ‘만월산’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계산동 중심의 ‘부평’에서 부평동 중심의 ‘부평’이 된 출발점이면서 동소정면(현 부평동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사건이 ‘굴포운하’ 계획이다. 고려 무신 정권 때 운하를 시도했다고 하나 전해진 것은 없고 기록으로는 조선 중종 때이다.

운하는 현재의 인천교 방향과 한강 하류 양 방향에서 뚫기 시작했는데, 한강 물이 현재의 부평동까지 통했기 때문에 공사 책임자인 김안로는 이곳에 ‘통수정(通水停)’이라는 정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양방향의 공사는 현재의 ‘원통이 고개’ 구간에서 암반을 뚫지 못해 미완성으로 남아있었다. 한강 물이 현 부평동까지 통수(通水)돼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마을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즉 운하 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은 주변 마을에서 동원돼 투입됐을 것이고, 공사 이후 물을 구하기 쉬어지면서 주변 땅을 논밭으로 개간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현재의 부평동 일대는 이때부터 생활공간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소정(同所井)’에 관한 기록은 영조 때의 『여지도서(與地圖書)』부터이고 이후 조선 후기 부평의 각종 지지와 읍지를 보면 모두 ‘동소정(同所井)’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통수정(通水停)’은 발음하기 쉬운 동소정(同所井)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만월산 원래는 ‘원통산’...굴포운하 강제부역 ‘억울’

‘만월산(滿月山)’의 원 지명은 ‘원통산(怨通山, 元通山, 圓通山)’이다. 그리고 ‘주안산(朱雁山, 朱岸山)’, ‘선유산(仙遊山)’, ‘약산(藥山)’이라고도 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금이라도 ‘원통산(元通山)’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怨通’이 ‘元通’으로 바뀐 것은 영조 때 전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산곡동의 산(철마산)을 - 현재는 원적산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원적산(元積山)’으로 기록돼있기 때문에 짐작이 가능하다.

‘원통산(怨通山)’은 굴포운하 실패 이후 당시 주민들에 의해 붙여진 지명이다. 당시, 공사에 동원된 인구를 읍지에서 추정해볼 수 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 기록된 동소정면의 인구는 162가구 636명이다. 1가구당 약 4명 정도이다. 노동할 수 있는 인구를 가구당 3명으로 본다면 약 480여 명이다. 국가의 사업으로 인해 생업(농사)을 포기하고 부역(賦役)에 강제로 동원된 것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이에 원통해서 ‘원통(怨通)’의 지명이 남아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부평사(富平史)』등 여러 기록에 ‘원통천(元通川)’은 현재의 인천가족공원인 큰골 칠성 약수터에서 발원한다고 돼있다. 현재는 대부분 복개돼 그 원형을 알 수 없지만 신촌1·2교, 등을 따라 올라가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복개된 롯데백화점 주차장으로 해서 현재 GM대우 부평공장 앞 굴포천으로 유입되고 있다. 토박이인 김영원(49)씨는 “어렸을 때 이곳에서 물고기도 잡고 친구들과 물장난 등을 했다”고 회상했다. 

군수공장 노동자들의 집단거주지였던 ‘삼능’

1939년 조병창 공사가 시작되면서 일제의 군수공장들도 같이 들어와 섰다. 그 최초의 기업이 ‘홍중(弘中: 히로나까)’이고, 1943년 삼릉(三菱: 미쓰비시)에 인수됐다. 이 공장 터가 현재는 ‘부평공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공장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를 공장 남쪽 맞은편에 만들었고 이곳을 ‘삼릉’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도로 주변 상점에는 ‘삼릉약국’, ‘삼릉갈비’ 등의 상호를 볼 수 있다. 이 일대는 1960년대에 현재의 부평 6동과 2동을 합해 ‘동수동’이라고 했고, 1970년에 부평6동이 정식 행정동인 ‘동수동’이 됐다가 1977년에 부평6동으로 개칭됐다. 

‘삼릉’공장이 있던 곳은 부평공원으로 되었고 현재는 ‘삼릉사택’이 있던 곳을 ‘삼릉’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20∼30대들은 ‘삼릉’의 의미를 모르고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민이나 이주한 주민들이 새로운 지명(부평2동)을 사용하는 것보다 구전되어 온 지명(삼능)을 사용하는 것이 장소를 인지하는 데 더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현재의 ‘삼릉’지역은 거의 다세대 주택이면서 주민들의 교체가 잦은 곳이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삼능을 잠시 거쳐 가는 장소로 인식하고 있다. 돈을 모아 더 쾌적한 환경이 갖추어진 곳으로 이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군수공장 옆 무허가 천막촌이었던 ‘신촌’

1941년 조병창 확장 공사에 일을 하기 위해, 또한 삼릉(미쓰비시)에 인수된 군수공장에 근무하고자 전국에서 노동자들이 부평역 일대로 이주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군수공장에 취직하면 강제 징용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수공장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사택에 입주했는데, 사택에 입주하지 못한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공장 바로 옆에 무허가 천막촌을 형성했다. 

이 마을이 현재의 ‘신촌(아랫마을)’이 되었고 해방 이후 집창촌이 되었다. 또한 마을이 형성된 이후 하나 더 형성된 곳을 ‘윗마을’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마을이 합해져 현재의 ‘신촌’이 된 것이다.

‘희망촌’은 한국전쟁 이후 집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주민들 모두 희망을 갖고 살자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다. 

                                                                      /임동윤·세일고등학교 지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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