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임동윤 선생의 ‘부평의 지명 이해’ <5> - 부개동

부평군 군지(郡誌)에 동소정면은 대정리·마분리·항동을 관할구역으로 두고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1918년에 발행된 지형도(1/50000)에도 세 마을만 표시돼 있는 것으로 볼 때 세 마을이 현 부평동 일대 원주민들의 생활공간임을 알 수 있다.

그 중 마분리(馬墳里)는 현 부개1동 일대다. 『한국지명총람』인천편에 “마분리는 말 무덤이 있으므로 말무덤 또는 마분, 마분리라 하였는데…”라고 나와 있다. 또한 『지명유래집』에는 “여러 곳에 전적지가 있는 것처럼 말무덤이 꽤 많이 있다. 이들은 마을 이름이 되기도 하고…”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말을 묻은 무덤이라고 하나, 많은 송장을 무리로 묻은 무덤이라고 풀어볼 수도 있겠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비변사등록』에 ‘대야원의 역마가 얼어 죽으니 동수재이 마분에 묻었다’란 구절이 나온 것으로 보아 주변 마장(馬場)의 역마를 키우던 곳의 말이 죽으면 모두 이곳에 묻어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 마을이 형성돼 현재에 이른 것이다.

마분리(馬墳里)의 정남쪽 봉우리가 금마산(錦馬山)이고 남서방향 봉우리가 부개산(富開山)이다. 금마산(201m)은 인천의 진산(鎭山)인 소래산에서 성현(星峴)-비루고개를 지나 바로 보이는 산-으로 한남정맥의 줄기이다. 현재 발행되고 있는 1/25000 지형도에는 ‘철마산’으로 표기돼 있다.

또한 <계양사>에는 “인천에는 3곳의 철마산이 있는데 계양구 효성동과 서구 가정동, 심곡동에 걸쳐있는 높이 227m의 산(천마산·天馬山)과 부평구 산곡동과 서구 가좌동 사이에 솟은 165m의 산(원적산·元積山), 그리고 남동구 만수동과 북구 일신동과의 경계에 있는 201m의 산(금마산·錦馬山)이다”라고 되어 있다.

<부평사 연구>에서는 “산의 형국이 비단결 같은 말 잔등이 같아서 생긴 산 이름이다”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철마산 3곳 중에 가장 남쪽에 있기 때문에 ‘남철마산’으로 부르고 있다. ‘부개산(봉)’은 ‘부개동’에서 명명된 최근 지명이다. 1946년 우리말 동명을 제정할 때 이곳이 부평이 열리는 곳이라고 해서 ‘부개동’이 되었고 ‘부개산’이 된 것이다. 그리고 ‘등잔산’은 부개산 북쪽 작은 동산이 마치 등잔과 같다고 하여 주민들이 붙여준 것이고, 최근까지 한국전력 부평지점이 있었다.

1915년 경인국도 도로 공사로 구릉지의 황무지 같은 곳들이 도로와 인접하면서 접근성이 향상됐다. ‘등세이’는 마분리 북쪽 등성이에 있는 마을이고 ‘길재’·‘긴재’는 이 마을의 고갯길인 ‘길등성이 고개’가 부르기 쉽게 변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이곳 도로명을 ‘등성이길’이라고 붙여져 있기 때문에 과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송장골’은 현 한국아파트 앞 산동네를 말한다. 부평 토박이 박승규(73)옹은 “이곳은 무덤들이 산재하고 있는 공동묘지였다”라고 회고했다. 또한 송장골의 개울에는 가재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가재골’이었고 이것이 발음하기 쉬운 ‘가자골’로 바뀌었다. 그러나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은 이러한 지명을 모르고 있으며, 또한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이곳이 모두 주택가로 변모했고 주민들도 토박이가 아닌 타지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굴재미’는 현 부개역 남부역 앞을 말한다. 이곳은 금마산(남철마산) 산줄기가 뻗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현재도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지명유래지-부평의 땅이름-에는 “경인선 철도가 이곳을 통과하면서 공사로 인해 구릉지는 완만한 경사지가 되었다. 1941년 조병창 확장공사가 시작되면서 공사장 노동자들의 부식재인 콩나물 공장을 만들게 되면서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지형은 굴과 같으나 언덕을 이루고 있어 사람들이 ‘굴재미’라고 하였다”라고 돼있다.

‘새굴재미(신궁동)’는 ‘굴재미’ 맞은편이다. 광복이후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붙여진 지명이다. ‘신궁동’은 마을 터가 궁터와 같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인천시사>에 “1930년대 후반 현 부개동에 세워진 공장이 ‘부평 요업’ 공장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공장 터를 ‘벽돌막’이라고 한다. ‘부평 요업’은 조병창 확장 공사에 필요한 벽돌을 공급하기 위해서 세워진 공장이다. 그러나 공장은 완공되었으나 광복으로 벽돌은 생산되지 못했고 공장 터는 집들이 들어서기 좋은 조건이 된 것이다. 광복이후 전국의 집이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벽돌공장과 기숙사 막사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벽돌막’이라 했다. 또한 이곳을 ‘신촌(새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정착한 주민들은 현 부평의 토박이가 된 것이다. 부개동 토박이 2세인 안영근(29)씨는 아버지에게 들어서 ‘벽돌막’이라고 하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 뜻은 모른다고 했다.

                                                                      /임동윤ㆍ세일고등학교 지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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