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부평’ ㉔ 굴포천의 어제와 오늘
인천투데이|인천 부평구(구청장 차준택)가 올해 개청 30주년을 맞이해 <인천투데이>와 함께 4월부터 ‘사진 속 부평’ 연재를 한다. 1995년 개청 후 30년 동안 구가 촬영하고 보관 중인 사진을 선별해 역사와 기억을 기록하고자 한다.
2000년 12월부터 25년 간 부평의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는 성기창(59) 부평구 사진 담당 주무관이 구술한다.<편집자주>
시간은 흐르고, 겨울은 가고, 봄이 온다. 쌀쌀한 날씨를 4~5개월쯤 버티면 따뜻한 햇볕과 함께 나들이하기 좋은 날들이 찾아온다. 봄이 되면 꼭 한 번쯤 부평구청에서 삼산동으로 흐르는 굴포천 물길을 바라보자. 잉어 떼가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장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봄의 굴포천은 생명을 품는다. 물고기가 헤엄치면, 새는 날아오른다. 하얀 백의를 곱게 차려입은 백로가 더하고 뺄 것 없는 날갯짓으로 바람을 타고 나른다. 오리도 떼를 지어 물 위에 동동 떠 있다.
지역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은 굴포천
맑고 깨끗하게만 보이는 굴포천은 사실 지역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골 하천을 시작으로 끔찍하게 오염됐다가, 콘크리트에 덮인 채 잊혔다가, 다시 물길을 되살리는 과정은 우리가 사는 땅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아는 굴포천의 첫 모습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우물에서 동암초등학교(동암초)를 다닐 때였다. 등하굣길 중간에 한센병 환자들이 기거하는 경인농장이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겁을 먹고 멀리 돌아가곤 했다.
백운역 방향으로 돌다 보면 굴포천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백운 남부1차 공영주차장 부근인데, 맑은 물이 무릎 정도까지 차올라 놀기 딱 좋은 곳이었다.
옛날 아이들이야 놀게 뭐가 있었겠는가. 그냥 물장구치고, 송사리를 잡아서 소주 됫병(약 1.8L)에 담으면서 놀았다. 특히 수질에 민감한 민물가재도 나올 정도로 물이 맑았던 기억이 있다.
굴포천 따라 많았던 미나리꽝
굴포천을 따라 미나리꽝(미나리밭)도 참 많았다. 아이들이 미나리꽝 위를 첨벙첨벙 뛰어다닐 때면, 동네 어른들은 부리나케 쫓아 나와 소리를 치곤 했다. 놀다가 혼나고, 도망가고, 웃고, 넘어졌던 곳이 바로 굴포천이었다.
실없는 기억이지만 남몰래 바라봤던 예쁜 여학생의 집도 하천변에 있었다. 옆자리 짝꿍이었다. 필자는 굴포천에서 첨벙이면서도 그 여학생이 혹시라도 밖에 나올까, 집을 힐끗힐끗 바라보곤 했다. 소년이었다가 인생 후반에 접어든 필자처럼, 그 집도 많이 낡은 채 그 자리에 남아있다.
그렇게도 맑고 맑았던 굴포천은 1980년대에 접어들며 오염되기 시작한다. 공업화가 계속되면서 부평 인구가 끝도 없이 늘어가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부평에 모여들었다. 사람이 많아지니 하수와 쓰레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분뇨와 쓰레기가 떠다니며 몸살을 앓은 굴포천
굴포천은 몸살을 앓았다. 사람들은 별생각 없이 더러운 것들을 하천에 내다 버렸다. 예전에는 돼지나 소의 분뇨가 떠내려올까 말까였는데, 이제 사람 분뇨와 쓰레기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굴포천 최상류 구간인 원통천의 오염이 심각했다. 이 주변에는 한센병 환자가 모여 살던 부평농장이 있었는데, 작은 공장들이 하나 둘 들어오면서 오폐수가 원통천에 섞여 들기 시작했다. 청천농장 주변의 청천천과 원적산이 시점인 세월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하천 주변에 사는 이들은 악취와 해충으로 고통받았다. 굴포천 둔치에서 기르던 채소도 시장에서 외면받기 시작했다. 다들 뭐에 오염됐을지 모를 먹거리를 입에 넣을 순 없었다. 굴포천은 불과 10여 년 만에 옛 모습을 잃고 도시의 하수구로 전락했다.
굴포천 쓰레기는 치우고 치워도 끝이 없었다. 1989년 공직 생활에 입직하고 나서야 그걸 알았다. 구청은 직원, 군인, 통‧반장 등 가능한 인력을 모두 동원해서 수시로 굴포천을 치웠다. 그런데 한참 치우고 나면 금방 쌓였고, 치우면 또 쌓였다. 어쩔 수 없는 시대였다.
1990년대 굴포천을 콘크리트로 묻어버린 부평구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구는 굴포천을 콘크리트 아래에 묻어 버리기로 했다. 굴포천 물길에 하수관을 설치하고, 도로나 주차장으로 쓰는 게 도시 환경에 더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굴포천을 비롯한 상류 하천들은 10여년에 걸쳐 복개됐다. 콘크리트 아래에는 하수관이 묻혔다. 오염된 하천이 사라지니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필자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폐기물과 하수 처리 인프라가 부족했던 당시에는 그게 맞는 방향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흘러 2000년대에 들어서자,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복개되지 않은 남은 구간이라도 잘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부평구청역부터 삼산동까지 구간은 복개하지 않고 남아있던 터였다.
갈산동~삼산동 미복개구간에 조성된 자연형 하천
이렇게 시작된 사업이 굴포천 자연형하천 조성사업이었다. 갈산동에서 삼산동까지 복개되지 않은 구간을 자연형 하천으로 만들고, 한강 물을 끌어와 흘려보낼 수 있는 시설을 설치하고, 사람들이 오갈 수 있도록 걷고 싶은 장소를 만드는 사업이었다.
사업은 2006년 11월부터 2008년 10월까지 이어졌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2009년 2월 오리가 굴포천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사진을 찍었다. 고 박윤배 전 부평구청장이 사진을 보더니 곧바로 관련 부서에 어떤 종인지 알아보라 지시했다. 겨울 철새인 흰뺨검둥오리였다.
2009년 4월에는 붕어가 굴포천을 거슬러 올라왔다. 하천을 살렸더니 점차 동물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잉어, 붕어, 매기, 백로, 맹꽁이, 금개구리 등 수많은 동물들이 새로 발견됐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굴포천은 생명을 품은 하천으로 변모했다.
부평1동 행정복지센터~부평구청까지 생태하천복원사업으로 재탄생 중
굴포천은 계속 변하고 있다. 부평1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부평구청까지 1.4km 구간이 굴포천 생태하천복원사업으로 다시 태어난다. 곧 공사를 마친다고 한다. 덮여있던 콘크리트를 뜯어내고 다시 물을 흘려보낼 날이 멀지 않았다.
날이 겨울이니 당장은 황량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부평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하천을 복원하면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필자가 어린 날 굴포천에서 첨벙이던 시절처럼, 아이들이 집 앞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굴포천 살리기에 힘을 보탰던 이들을 몇 명 언급하고 싶다. 2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노력하는 이들이다. 박남수 전 부평구의원은 굴포천살리기 시민모임 대표 활동을 했다. 굴포천 주변에 컨테이너에서 머무르며 환경운동을 했던 기억이 있다.
최화자 전 구의원은 갈산동 굴포천 건천화대책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굴포천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흘려보내자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심상호 전 부평시설관리공단 이사장은 지금도 굴포천에서 종종 얼굴을 본다. 굴포천 네트워크 대표도 맡고 있다.
이들의 활동 덕에 지금의 굴포천이 있는지도 모른다. 호찌민의 옥중시를 인용하고 싶다. ‘그대의 노고가 가볍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늘 그대를 기억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