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지역언론 지원사업] 정전협정 70주년 ⑤
연백에서 피난 온 강화 교동도 실향민 인터뷰
"가족들과 생이별, 전쟁 다시 벌어져선 안돼"

인천투데이=이재희·김현철 기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국제연합군 대표인 윌리엄 해리슨(William K. Harrison) 미국 육군 중장과 남일 조선인민군 대장이 판문점에서 만났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을 중지하는데 교전 양측이 합의한 ‘한국정전협정(Korean Armistice Agreement)’을 위해서다.

이 협정의 정식명칭은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Agreement between the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 on the one hand, and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and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on the other hand, concerning a military armistice in Korea)‘이다.

정식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미국 육군 대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 협정에 서명한 주체이다.

미 육군 중장 해리슨과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이 만나 3자가 합의한 협정서를 교환했으며, 합의 12시간 후인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를 기해 발효됐고, 이는 한반도 정전체제의 기본 규범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은 정전협정의 당사국은 아니지만, 정전협정의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나라이다. 그리고 서해는 한반도의 가장 큰 화약고로 불린다.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은 인천의 모습을 돌아본다. <기자말>

“교동도 지척에 바로 고향을 두고도 못 가는 상황이 안타깝다. 죽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고향 땅을 밟고 싶다.”

한국전쟁 당시, 북측 황해도에서 강화군 교동도로 피난 온 장영호(87)씨는 <인천투데이>와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인천투데이>는 인천시 기획취재 일환으로 실향민 장영호씨를 비롯해 최재옥(92)씨, 최봉열(92)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장영호씨.
장영호씨.

장영호씨는 1936년 황해도 연백군 해룡면 용남리 299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연백군 용정리로 이사해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 살았다.

장씨는 “전쟁 당시 16살이었다. 아버지가 쌀 반 가마를 주면서 잠시 교동도 인사리에 아는 사람 집에 가 있으라 했다”며 “8남매 중 둘째 였는데, 1951년 1.4후퇴 때 첫째 형과 함께 월남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 과정에서 형과 헤어지게 됐고 혼자서 교동도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배가 고파 잠시 음식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군인들에게 붙잡혀 군대로 끌려갔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3년간 육군 하사 생활을 한 뒤, 8250부대로 부대가 개편이 됐다”며 “1971년 7월 전역 전까지 20년간 군 생활을 계속 했다”고 전했다.

장씨는 아직도 강 하나를 끼고 바로 보이는 북측 연백평야를 보면 고향에 가고 싶은 그리움이 커진다고 했다.

장씨는 “북측에 있는 남은 형제들과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가 너무나 그립다”며 “당시엔 전쟁이 그리 길어질 거라 생각하지 못했고, 금방 돌아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한 “휴전 이후 집과 마을 전부가 이전됐다는데, 이런 이유로 현재 가족들이 어디 살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며 “통일이 되면 선산에 올라가 할아버지 묘에 가서 술이라도 한잔 올리고 싶다”고 했다.

이어 “같이 월북해 그나마 유일한 혈육으로 의지해왔던 형이 죽은지도 어느덧 3년째”라며 “통일이 되면 함께 고향에 돌아가자고 얘기하곤 했는데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끝으로 “요즘 국내 정세를 보면, 전쟁이 언제 촉발될지 모르는 위기에 다시 놓인 것 같아 두렵다”며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가족끼리 생이별을 하게 하는 전쟁은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 평화가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 개방해 왕래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

최재옥씨.
최재옥씨.

최재옥(92)씨는 1931년 연백군 도천면 금삼리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고, 유년기를 보냈다.

최씨는 “연백은 농사짓기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 온 가족이 농업에 매달렸다”며 “그러다 형과 누나들이 혼인할 나이가 되자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졌고, 농업이 아닌 다른 일을 찾다가 개성의 한 직조공장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그러던 중 1950년 전쟁이 발발했고 인민군이 새벽을 기해 개성시를 모두 점령했다”며 “그뒤 연백으로 돌아왔으나, 인민군에 가야 할 나이라 방공호(땅굴)를 파고 숨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10월쯤 유엔군이 개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인민군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방공호를 나와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며 “그 뒤 한국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나진까지 올라갔다. 1951년 1.4후퇴가 발생했고 잠시 남측에 내려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최 씨는 그렇게 가족을 남겨둔 채 쌀 두말을 지고 혼자서 교동도로 향했다고 했다.

최 씨는 “유엔군이 임진강까지 올라오면서, 함경도나 평안북도 등에서 피난민들이 대거 강화도, 교동도, 연평도 등으로 내려왔다”며 “당시 북쪽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육군 을지 제2병대가 만들어졌고, 타이거 여단도 생겼다”고 말했다.

이어 “교동도로 피난을 올 때부터 현재까지 생을 돌아보면,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발생해선 안된다는 확신이 든다”며 “전쟁 당시엔 유엔군이 연백을 다시 수복할 줄 알았고 잠시 교동에 머물며 기다린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하지만 유엔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그렇게 휴전선이 만들어지고 판문점이 생겼다”며 “남북 간 왕래라도 이어진다면 고향에 가서 부모님 시신이 묻혀진 곳이라도 찾고 싶다”고 호소했다.

끝으로 “교동도와 연백평야 사이 뻘에서 꽃게를 잡고, 주문, 아차, 불음도 사람들이 연백에서 그것을 팔며 서로 활발하게 교류했던 전쟁 이전의 시절이 아직도 그립고 눈에 생생하다”며 “남북 개방이라도 이뤄져 서로 교류할 수 있길 염원한다”고 강조했다.

최봉열씨.
최봉열씨.

최봉열(92)씨는 1931년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미산리 보해동 15번지에서 태어났다.

최씨는 “1950년 전쟁 당일 바로 교동도로 피신했다”며 “당시 인민군으로 16살 이상을 모집했는데, 20살이라 징집될까 무서워 내려온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4형제였으며, 큰형이 서른 살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가장인 큰형이 집도 지키고 농사도 해야하다 보니, 나머지 3형제들이 집을 떠났다”고 회상했다.

또한 “형제들이 함께 나가다 인민군에 붙잡히면 모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게 형제들이 서로를 봤던 마지막 모습이었다”며 덧붙였다.

이어 “교동도로 넘어왔지만, 당장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이틀 뒤 다시 연백으로 돌아갔다”며 “일터도 식량도 아무것도 없었고 쌀을 약 두말정도 갖고 다시 교동도로 향했다. 그 뒤로 1.4후퇴 전까지 계속 교동도와 북쪽의 집을 왔다갔다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 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을지타이거부대로 들어갔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다”며 “1952년 수료 뒤 군대는 떠났다”고 말했다.

최씨는 교동도가 원래 고향처럼 느껴질 정도로, 많은 정이 들었다고 하면서도 가끔 망향전망대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본다고 했다.

최 씨는 “최근엔 공해 때문에 뚜렷하게 보이진 않지만, 아직까지 고향이 보고싶은 마음에 올라가게 된다”며 “지금 고향에 간다 한들 날 아는 이도, 반기는 이도 없을 테지만 통일이 된다면 한 번이라도 다시 가보고 싶다”고 전했다.

※ 이 기획기사는 2023년 인천광역시 지역언론 지원사업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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