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지역언론 지원사업] 정전협정 70주년 ⑧
“2년 동안 지리하게 이어진 한국전쟁 정전협정”
정전-평화협정 용어논란 “사실상 전쟁 끝난 것”

인천투데이=김현철·이재희 기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국제연합군 대표인 윌리엄 해리슨(William K. Harrison) 미국 육군 중장과 남일 조선인민군 대장이 판문점에서 만났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을 중지하는데 교전 양측이 합의한 ‘한국정전협정(Korean Armistice Agreement)’을 위해서다.

이 협정의 정식명칭은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Agreement between the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 on the one hand, and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and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on the other hand, concerning a military armistice in Korea)‘이다.

정식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미국 육군 대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 협정에 서명한 주체이다.

미 육군 중장 해리슨과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이 만나 3자가 합의한 협정서를 교환했으며, 합의 12시간 후인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를 기해 발효됐고, 이는 한반도 정전체제의 기본 규범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은 정전협정의 당사국은 아니지만, 정전협정의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나라이다. 그리고 서해는 한반도의 가장 큰 화약고로 불린다.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은 인천의 모습을 돌아본다.

정전협정이 현재 한반도에서 지니는 의미와 정전협정이 인천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중국사회과학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중국 산동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한 김국래 박사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래는 김 박사의 답을 정리한 글이다. <기자말>

김국래 국제관계학 박사. 
김국래 국제관계학 박사. 

“정전협정, 이승만 혼자 적극 반대”

국제연합군과 조선인민군은 한국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협의를 1951년 7월 1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2년 넘게 진행했다.

양측이 협의 중이던 전선은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아 와있던 상태이다.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소모전을 벌일 뿐이었다.

미군은 공군과 육군(포병)을 중심으로 작전을 펼쳐 물자는 많이 쏟아 부었지만, 희생자는 많지 않았다. 다만, 정치적 압박은 있었다.

중국은 상황이 달랐다. 미국과 장기전을 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타이완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세계도 한국전쟁에선 일방이 한쪽을 점령할 수 없으며, (전쟁 이전 상태인)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경계가 정해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북진통일’을 외친 이승만 정부만 이를 반대했다. 민간인을 동원해 ‘북진’을 하지 않는 미군을 향한 시위도 전개를 했다.

국제연합군과 조선인민군의 협상이 마무리 될 즈음엔 정전협정이 이뤄질 것 같다고 판단해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정전 방해 행위였다.

양측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를 기해 정전협정을 선포했지만, 실제 정전이 이뤄지는 것은 같은 날 밤 12시였다.

선포와 실제 행위가 이뤄지는 간격 12시간 동안 미군이 한반도에 들여온 모든 물자를 북측에 쏟아 부으면서 12시간 포격이 이뤄진다.

정전협정 당시 한강하구 수역 지도. 
정전협정 당시 한강하구 수역 지도. 

“2년 이상 오래 협상한 이유는 서해 경계 문제”

남측 정부를 제외한 대부분 당사자가 한국전쟁 종료를 원하고 있었지만, 2년 이상 협상이 진행된 이유는 ‘한강 하구와 서해 경계 문제’ 이다. 인천으로선 굉장히 민감하게 다가오는 문제이다.

당시 공군과 해군의 전력은 국제연합군(미군)이 압도적이었다. 섬이라는 섬은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처음엔 미국에서 3해리를 봉쇄하겠다고 주장했다. 조선인민군이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

정치적 압박을 받아 정전협정을 해야 했던 미국이지만, 모든 섬을 반환하고 나오는 것은 억울했을 것이다. 최대한 전략적 성과를 남겨두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정전협정문에도 명시한 ‘서해5도(백령·대청·소청·연평·우도)’를 제외한 나머지 섬을 반환했다.

‘서해5도’는 육상경계선을 해양으로 연장했을 때, 육상경계선보다 상당히 북쪽에 있지만 유엔군 관할로 남겨둔 것이다.

다만, ‘서해5도’를 기준으로 해상경계선을 획정하면, 국제법이 금지하는 해상 봉쇄를 하는 꼴이 돼버렸다.

이를 피하기 위해 양측은 정전협정문엔 지도를 첨부해 ‘서해5도’의 위치만 표시하고, 해상경계선 획정은 추후 과제로 미뤄둔 채 협정을 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너머 불법 조업 중인 중국어선.
서해 북방한계선(NLL) 너머 불법 조업 중인 중국어선.

‘북방한계선(NLL)’과 관련한 여러가지 설

정전협정 이후 마크 웨인 클라크 주한미군 사령관이 ‘더 이상 북쪽으로 넘어가면 위험해진다’며 선포해 이른바 ‘클라크 선’이라고 불린다.

민간과 군에 모두 적용한 선이지만, 남측에 대해 북측을 향한 행위 금지 명령이다. 남측 내부를 대상으로 한 경계선이기 때문에 북측과 협의하고 통보할 이유가 없었다.

“정전협정은 전쟁을 멈추는 것으로 사실상 전쟁 끝났다”

일각에서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라고 주장한다. 이 논리는 이승만 정권이 정전협정이 이뤄지고 난 이후 휴전이라고 표현을 하며 시작됐다.

이승만은 북진을 통해 완전한 한반도의 대통령을 하고 싶은데 정전협정이 돼 불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휴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언제든 북진을 할 수 있다는 뜻을 담았다.

하지만, 한국어·영어·중국어로 작성한 정전협정문엔 ‘전쟁을 멈춘다’는 의미를 담아 정전이라고 명확히 명시했다.

정전협정문의 내용을 보더라도, 한강하구까지 이어지는 비무장지대라고 하는 물리적 격리 공간을 포함했다. 쌍방의 우발적 충돌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중립국 5개로 이뤄진 감시기구가 있었고, 전쟁 행위에 참여했던 쌍방이 정치 협상을 할 수 있는 ‘군사 정전위원회’라는 기구도 있었다.

이후 평화협정 체제로 넘어가는 것을 강제하는 조항까지 만들어 놨다. 3개월 내에 ‘한 급 높은 정치 협상’을 진행한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만 지켜지지 않았을 뿐 정전협정문은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선언·합의하고, 국제법이 인정하는 유일한 문서이다.

정전협정 국문본. 
정전협정 국문본. 

정전협정문에 근거해 정전협정은 전쟁을 잠시 쉬고 있을 뿐이라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 만약 정전협정을 무시한다고 하면, 비무장지대도 없어야 하고, 군사분계선도 필요 없어진다.

정전협정문은 외국군 문제와 군비 증강 문제도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주한미군은 더 이상 숫자를 늘리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중요한 것들이 많다.

정전협정문을 제외하면 한반도의 남북 관계를 규정할 합의나 조약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정전협정이다.

다만, 한 급 높은 정치회담 등을 통해 한반도 내 외국군 문제와 한반도 내 정치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이를 통해 현 상황을 반영한 새로운 협정 또는 조약을 맺는 일도 중요하다.

※ 이 기획기사는 2023년 인천광역시 지역언론 지원사업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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