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⑦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1905년 경부선, 1906년 경의선 개통으로 열차 이용이 증가하며 이후 승객 편의를 위해 끽다점(차를 마시는 다방, 카페 형태의 장소)이 중요 열차역에 생겨났다.

1914년이면 경성에 ’탑동카페‘라는 이름으로 현대적인 느낌의 장소가 등장한다. 일찍부터 끽다점, 다방, 카페 등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차를 마시는 공간이 나타났기 때문에 “현재의 ‘베이커리 카페’ 원형이 언제, 어느 곳에 처음 나타났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대의 카페가 보여주는 외형과 사회적 역할을 종합적으로 보여준 최초의 카페가 있었다.

1920년대부터 ‘명치제과’라는 큰 회사가 자본을 투자해 경성에 매점을 냈다가 이후 경성 시내에 3층 건물을 통으로 카페와 레스토랑이 복합된 형태를 만들어 운영했으며 공연과 전시회 등을 개최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1930년 10월 대대적인 명치제과매점 개장 광고가 신문을 장식했다. 명치제과의 경성매점은 이전에도 존재했으니 규모를 키운 확장 개업인 셈인데, 광고를 보면 건물 모양과 위치가 표시된 약도와 함께 일본에 소재한 24개의 분점까지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조선신문 1930년 10월 1일 광고사진)

조선신문 1930년 10월 1일 광고사진.
조선신문 1930년 10월 1일 광고사진.

경성매점 1, 2층은 명치제과에서 생산하는 과자, 빵 등을 차와 함께 마시는 카페 기능과 값비싼 양식을 먹는 공간이었다. 3층은 주로 공연 전시회 등의 행사와 함께 연회 기능을 갖춰서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가인 홍난파 포함 제금3중주단 연주회가 열리기도 했다.

명치제과매점은 당연히 경성의 명소가 됐고, 워낙 규모가 커서 여타의 카페나 일반 제과소와 구별되는 장소로 인식돼 사람들은 경성매점이라는 이름보다 제과회사에 들렀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당시 모던보이에 속하고 활동적인 대학생들이 드나들던 카페와 연애 등 생활상을 약간 엿볼 수 있는 ‘남학교평판기男學校評判記, 착실着實한 학생學生이 되자!’(1932년 11월 01일 ‘동광’ 제39호)를 살펴보자.

京城帝大本科(경성제대본과)

장서藏書 많은 도서관圖書舘의 주인공主人公들이 되어 그런지 학적學的 기풍氣風이 돌고 연구적硏究的 태도態度가 보인다.

그리고 가페 출입出入은 일주일一週日에 한 두번만이 아니고 또 명치제과회사明治製菓會社는 전용식당專用食堂이라니 카페나 막걸리집을 단니는 것보다 좀 나을가?

延禧專門學校(연희전문학교)

연희延禧하고 부르면 연짜가 들어 그런지 「오! 연애편지 잘 하는 학교學校」 하고 직각直覺이 된다. 모양 잘 내기로 첫손 꼽는 그들은 모자帽子 쓰고 교복校服 입은 후 거울 보는 시간時間이 복습시간復習時間이나 예습시간豫習時間에 비하여 배倍나 될 것이다.

京城醫專(경성의전)

카페에서 위안慰安을 구하는 그들

의학전문醫學專門하면 어쩐지 학업學業에 충실忠實한 것 같이 생각된다. 내가 생각하고 잇는 이 點에서 버서나지 않엇으면 좋으련만... 그날의 푸로그람이 끝나면 상습적常習的으로 카페를 간다니 웬 셈일까?

世富蘭偲醫專(세브란스의전)

까운주머니에 반쯤 너어진 청진기聽診器

세전世專하면 「글세」라는 말이 연발된다. 아마 신통치는 아는 모양이지? 목사牧師아들님이 되든지 영감 박힌 좋이만 잇으면 세전입학世專入學에는 저능아低能兒라도 그만이라니 무슨 말인지.

하로는 세부란쓰 병원病院 갓어 응접실應接室에 앉엇자니 문이 반찜 열리자 힌 까운 입은 실습생實習生들이 목을 길게 뽑고 나를 디려다 본다. 그리자 조곰 잇드니 뒤를 이어 기웃 기웃 디려다 보는 학생이 합해 보면 한 23名 늘 보는 女子가 무어 그리 이상한지 그뿐인가. 까운주머니에 청진기聽診器를 반찜 넣고 뽐내며 女子 앞으로 왓다 갓다 하는 모양!

위의 글은 이화여전을 다니는 여학생이 썼고 상당히 흥미 위주의 기사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사실로 믿기보다는 재미로 읽으면서 시대적 분위기를 느끼면 좋겠다. 또한 추가적인 설명을 해야 오해가 없을 내용이 많아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다.

이 글에 나오는 경성의전과 세브란스의전은 국립과 사립의 차이가 있다. 당시 일본은 경성의전, 평양의전 등 의학전문학교 입학생 중 조선인 비율을 일본인의 3분의1 또는 4분의1로 차별적인 제한을 두고 있었다.

식민지라는 현실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며, 천재시인 이상이 건축사가 되기 위해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공대 전신)에 들어갈 때도 2명의 조선인만 입학이 허락됐다.

세브란스의전은 서양인에 의해 만들어진 기독교재단 사립으로 입학 비율 제약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조선인 교수와 학생으로 채워진 학교였다.

따라서 재정상의 이유로 기부입학이나 기독교 계열의 연줄이 입학에 영향을 끼쳤던 상황을 비꼰 내용이 글에 담겼으나 세브란스의전 입학이 쉽다는 뜻은 아니다.

경성제대 학생이 가는 명치제과회사는 경성매점을 말하며, 당시 경성제국대학을 다니는 조선학생이 방학을 맞아 시골 고향을 가면 고향 군수가 인사를 올 정도였다니 대단히 입학이 어려운 학교로 이해하면 된다.

경성일보 1930년 9월 15일자.
경성일보 1930년 9월 15일자.

3층 건물의 경성매점 개장일 전 명치제과에서 여점원 구인광고를 냈는데 일본인 열몇 명, 조선인 열몇 명을 뽑을 예정으로 이력서에 사진을 첨부해서 제출하라는 내용이 있다.(경성일보 1930. 9. 15 사진)

여점원을 뽑는 숫자만 보더라도 규모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일반 카페로 인식하지 않고 매점을 회사와 동일시했다. 일본인 직원이 많다는 뜻은 일본인 손님이 주로 드나드는 것을 의미하고 당연히 서민층 조선인 출입은 쉽지 않은 장소라는 뜻이다.

당시 영화관의 경우 일본인이 가는 곳, 조선인이 가는 영화관 따로 구별됐는데 일본인이 가는 영화관은 가격이 훨씬 비쌌다. 같은 직장이어도 일본인 월급은 높게 책정됐으며, 일본인이 가는 영화관은 대개 냉난방 시설이 완비된 곳이었다.

조선인이 가는 영화관은 냉난방 시설이 없어 혹한기, 혹서기는 영화관 수입이 없는 비수기였다. 한겨울 따뜻하게 영화를 보려면 구멍이 난 깡통에 숯불이 들어 있는 보온기구를 사서 좌석 앞의 발 사이에 놓고 관람했다.

명치제과는 경성매점 외에도 인천, 군산, 함경도지역 등 많은 곳에 제빵, 제과에 필요한 유제품을 비롯해 각종 재료를 공급하는 도소매 매장을 운영했다.

기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카페 내용을 보면 약간 부정적인 어감이 사용됐는데 이는 카페라는 장소가 차를 마시는 것부터 시작해 술과 향락을 제공하는 다양성을 가졌던 때문이다.

1920년대 경성은 여름이면 아이스커피를 마실 수 있었고 빵, 코코아, 과자, 커피, 술 등이 판매되던 카페는 규모와 손님의 특성부터 시작해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1936년 일본 영화잡지 기사 ‘만주 지나 조선영화계 다시 둘러보기’(이시카와 사이)를 보면 큰 자본을 가진 카페 경영자가 언급된다.

이번에 경성에 와서 놀란 것은, 경성의 중심 메이지마치의 교차점에 이시바시 료스케 씨의 손으로 쇼치쿠영화관이 신축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원 약 2천 명을 수용하는 대규모의 영화관으로.....

이시바시 씨는 마루빌딩 카페의 경영자로서 두뇌도 있고 배짱도 있으며, 새로운 흥행가로서 경성영화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내용을 보면 지금의 CJ, 신세계, 롯데가 영화와 카페 등 외식사업에 투자하는 양상과 비슷한 모습을 말하고 있다. 영화제목의 ‘만주 지나 조선영화계’는 만주, 중국, 조선영화계를 뜻한다.

만주를 지나서 조선영화계를 둘러봤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시의 카페는 대규모 일본 자본이 투입돼 경성에서 독일 미녀, 러시아 미녀가 서빙을 한다고 서로 광고를 하며 경쟁을 했던 상황도 있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공간이었다.

*빵을 주제로 글을 쓰지만 100년 전의 생활상은 지금과 차이가 크고 빵을 판매하는 곳은 끽다점, 카페와 인접하거나 같이 운영됐던 곳이 많았던 탓에 앞으로 종종 마주치게 될 예정이라 번외로 2회 정도 카페를 주제로 다룰 예정이다.

하나는 일제강점기 저항의식과 문화 예술적 기능을 수행했던 공간으로, 영화 ‘밀정’에 나오는 카페 카카듀를 인천과 엮어서 이야기할 것이다. 또 하나는 퇴폐적 장소였고 학생들이 드나드는 문제로 시끄러웠던 카페 이야기가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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