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⑧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1933년 4월 ‘별건곤’은 재밌는 상상력을 발휘 영국작가 버나드 쇼(1856~1950)가 여행 중 태풍을 만나 조선의 인천항에 왔고, 취재기자와 인천부두 선술집에서 대화를 나누며 문화교류를 한다는 흥미로운 기사를 냈다.

기자는 버나드 쇼를 만나 재치 있는 통역을 하면서 ‘인천부두 닷지호텔(仁川阜頭선술집)’으로 안내해 조선의 레스토랑에 진열된 음식과 술안주를 영어로 번역 “삐-푸스틱 이것이 쌜라드 치큰 피쉬 올치올치 요것이 포-크”라며 가격까지 소개 웃음을 자아낸다.

매일신보 1939년 11월 6일.
매일신보 1939년 11월 6일.

“요것이 호트케익인데 조선말로 빈대떡”(사진 매일신보 1939년 11월 6일) 가격은 only 5 cent(5전錢)이라고 알려주며 좀 쌉니까? 농담을 던지는 유쾌한 화법을 구사하며 취재기자는 폭넓은 상식까지 자랑했다.

당시 빈대떡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빈자貧者떡이라 불렸을 정도로 서민 친화적인 음식이며,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1924년)에서 인력거꾼들이 막걸리와 함께 빈대떡을 잘라 화로 위 석쇠에서 구워 먹는 세세한 묘사로 현대인에게도 매우 친숙하다.

한동안 벌이가 시원찮던 인력거꾼 김첨지는 오랜만에 2원 90전을 벌어 선술집에 간다. 선술집에서 만난 친구 치삼이와 막걸리 한 잔에 빈대떡 한 장을 5전 가격으로 먹는다. 김첨지는 집에 가면서 아내에게 줄 설렁탕도 빠트리지 않았으나 이후의 슬픈 결말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은 친구 치삼이와 막걸리 4잔씩 마실 때 빈대떡 2장씩과 떡을 각각 먹었고 값은 40전인 대목이다. 당시 술값에는 항상 안주가 기본으로 포함됐다. 즉 막걸리를 마실 때 빈대떡이나 다른 안주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전 글 ‘애국빵’ 이야기에서 조선총독부는 주세령((酒稅令)으로 가정에서 술 담그는 일을 규제했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총독부는 여기에 더하여 과거부터 내려오던 관습인 술값에 안주가 포함된 주막, 선술집의 판매 형태를 규제했고 술과 안주를 따로따로 계산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애주가들의 반발이 커서 한동안 시내 주점의 매출이 감소할 정도였지만 조선총독부를 이겨낼 수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 압력에 마지못해 적응했다지만 서서히 삶의 방식이 변한 결과 조선의 정겹고 특색 있는 문화가 사라진 아쉬움이 크다.

사진에 있는 옥수수빵 기사 아래 핫케익 만드는 법이 있는데 공식 명칭은 팬케이크이다. 팬케이크와 빈대떡의 가격 비교는 버나드 쇼와 만난 기자가 인천부두 선술집에서 값이 싸다는 농담에서 이미 설명한 셈이다.

일단 팬케이크와 빈대떡은 크기부터 차이가 있고 막걸리 한 잔이 포함된 빈대떡과의 비교는 실로 난감한 일이다. 빈대떡 가격이 저렴하고 서민 친화적인 음식이지만 믹서기도 없이 수공으로 만드는 과정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빈대떡을 만들기 전에 녹두를 물에 불려야 했고 불린 녹두는 부부 또는 아이들이 도와가며 밤새 맷돌질을 하거나 낮에 맷돌 돌리는 사람을 따로 고용해야만 했다. 대개 두세 사람 여성이 붙어서 하는 고단한 오랜 시간의 맷돌질에는 노동요가 있었고 노래에 한과 시름을 담아 함께 털어냈다.

離虛島러라 이허도러라.
이허, 이허 離虛島러라.
이허도 가면 나 눈물난다.
이허말은 마라서 가라.
울며가면 남 이나웃나
대로大路한길 노래로 가라. (노래 부르며 가거라는 말)
갈때보니 영화榮華로 가도
돌아올땐 화전花旃이러라. (花旃은 상여喪輿를 말함)

나거들난 남자로 나라,
나거들난 군자로 나라,
남의 군자 몸에 나나라.
몸에 든 病 술(酒)에 드는, (몸에 병이 잇는대다 술을 먹기 시작하니)
드난날 줄 몰나라 한다, (병이 드니 나을 줄을 아지 못한다는 말)
삼년묵은 삼어지통에, (삼어지桶은 약 넛는 그릇인 듯)
일천약一千藥은 다 들어서도,
내병에는 약업서라.

닭은 울어 날이나 샌다,
내야 운들 어느날 새리.
어떤 새는 낫(晝)에도 운다,
어떤 새는 밤에도 운다,
요새 저새날가튼 새야,
밤낫몰라 우염새러라.
내 前生이 얼마나 하면,
잠결에도 섀한숨쉰다,
한숨 답답안먹힌 소리,
동남풍에 날어 나가라.

‘濟州島의 民謠 五十首, 맷돌 가는 여자들의 주고 밧는 노래’(1923년) 중에서

빈대떡 만드는 과정은 많은 시간과 노동이 필요했으나 식민지 조선의 노동력은 값이 쌌다. 반면 산업화가 앞섰던 일본에서 유입된 제품들은 쉽게 넘보기 어려운 높은 가격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같은 일을 하더라도 일본인과 조선인의 급여는 달랐고 일본인은 충분한 구매력을 가졌다. 그러나 조선에서도 신문물을 배운 젊은 층으로 책이나 신문, 잡지를 통해 도넛이나 각종 디저트류를 접했던 모던한 사람들에게는 맛보고 싶은 유혹이 따랐다.

도넛 동아일보 1938년 6월 18일.
도넛 동아일보 1938년 6월 18일.

신문은 이런 욕구를 해소할 통로로 다양한 종류의 간단 제빵 제과법을 소개했다.(사진 도넛 동아일보 1938년 6월 18일) 그러나 경성, 평양 등을 제외한 소도시 농촌 주민들에게는 낯선 음식이었던 탓에 서울 구경을 온 ‘촌사람 코를 베는 일’이 허다했다.

경성의 한 카페에서 세 명이 케익과 커피를 마시고 30원이 넘는 바가지요금에 경찰서로 넘어온 사건 기사도 있다. 당시 30원의 가치는 현재 웬만한 초임공무원 월급을 넘어선다. 과일을 포함해 실생활에서 먹었던 간식의 소비자 가격 100여년의 차이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1932년 ‘모뽀모껄의 신춘행락新春行樂 경제학經濟學’에서 나온 젊은 연인 두 명이 1원 예산으로 남산공원 소풍을 계획해 준비물을 사는 가격표가 있는데 먼저 원문을 보고 설명을 덧붙이겠다.

一.빵 二十錢(네 개)
一.설탕 五錢(가루)
一.사과 十錢(두 개)
一.빠나나 二十錢(열개)
一.어름사탕 五錢(한줌)
一.돗자리 세 十錢(한닙)
一.나무 네 두 병 十錢(일인분 한 병식)
一.뎐차삭 十錢(귀로에 탈 것)

計 一圓也

위 내용의 레모네이드(나무네) 한 병 가격은 10전으로 인력거꾼 김첨지 아내가 그토록 먹고 싶다던 설렁탕 한 그릇 가격과 같다. 빵 4개 20전은 현미빵(겐마이빵) 가격으로 생각보다 작은 빵이며 설탕에 찍어 먹을 계획으로 보인다.

돗자리 세 10전은 현대의 바닷가 피서지 파라솔 아래 돗자리와 비슷한 남산공원 전망 좋은 곳에 마련된 자릿세이며 어름사탕(얼음과자)도 함께 파는 장소였을 것이다. 판매지역에 따른 차이가 있겠으나 얼음과자 값이 3전인 판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은 30전에 판매됐다는 기록이 있어 커다란 가격 차이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막연히 개화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현대인이 먹는 거의 모든 종류의 고급 빵과 디저트류가 존재했다. 다만 매우 비쌌던 탓에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을 뿐이다.

일본은 지리적으로 동양에 자리했으나 유럽문화를 동경해 경성을 포함한 대도시에서는 서양 식문화인 제과와 제빵 강습회가 자주 열렸고, 시간과 여력이 없는 소비층을 위한 간단 제과법도 신문과 잡지를 통해 소개됐다.(사진 푸딩 동아일보 1938년 11월 3일)

푸딩 동아일보 1938년 11월 3일.
푸딩 동아일보 1938년 1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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