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⑤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1941년 1월 13일 매일신보는 절미운동 일환으로 10, 20, 30일 세 차례에 걸쳐 ‘애국빵’을 판매할 예정이며 밀가루가 주성분인 흰빵이 아니라 콩가루, 수수가루, 감자가루 같은 잡곡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기사를 냈다.(사진 왼쪽)

여러분은 오늘날까지 혼식을 해왔으며 따라서 여러 가지 대용식도 해왔습니다. 그리하여 조흔 성적을 내고 잇거니와 그중에도 ‘빵’대용식은 상당히 조흔 성적을 내고 있습니다.

매일신보 애국빵에 대한 기사는 당시 쌀 대용식 이용 상황을 알려주는 내용으로 시작해 잡곡에 흑설탕을 첨가한 빵 이용을 권하고 있다.

기사 논조는 단순한 권장처럼 보일지라도 시대적 상황에서 보면 조선총독부의 강제력은 상상을 뛰어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940년 1월 9일 기사는 식품연구가, 이화전문교수 등 전문가 대담형식으로 독일 흑빵을 주제로 영양이 좋다며 잡곡을 사용한 빵을 권장하고 있다.

애국빵 관련한 내용이 실린 기사 갈무리.
애국빵 관련한 내용이 실린 기사 갈무리.

1941년 기사는(사진 오른쪽) 40년 기사인 독일 흑빵에 이어 ‘애국빵’이라는 강력한 계몽 주제를 만들고 잡곡빵을 밥 대신 먹도록 유도했다. 메이지유신 후 급성장한 일본은 1900년 인구수 4380만명에서 1918년 5480만명으로 증가했다.

19년간 인구는 25%가량 증가했으며 산업 발달과 군국주의 확장으로 청년인구는 군대와 산업인력으로 빠져나가고 군량미 수요가 불어난 상황에 더해 농업 생산성은 인구증가율과 수요를 뒤따르지 못해서 쌀 부족과 가격 폭등 사태에 직면 교토와 나고야를 중심으로 성난 군중이 쌀 가게와 유통 회사를 불태우는 등 ‘쌀소동’이라는 폭동 상황을 맞이했다.

다급해진 일본은 조선의 쌀을 수탈했고, 땅과 곡식을 빼앗겨 연해주, 만주 등으로 쫓기는 디아스포라에 내몰린 식민지의 처참한 상황은 3.1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본도 대책 없이 시간만 보낸 상황은 아니었고 일찍부터 혼분식 권장 등 다방면에 걸쳐 대책을 수립, 시행하고 있었다.

좋은 예로 곡물 가격이 높았던 시기인 1차세계대전 때 조선총독부는 1916년 주세령((酒稅令)을 시행했다. ‘일제강점기 주세령(酒稅令)의 실체와 문화적 함의’(이화선, 구사회)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제의 관심은 다분히 자원 수탈과 세수 확충에 있었다”라는 설명과 함께 조선에서 거두어들인 조세수입 가운데 주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1910년 2.0%에서 1935년에는 30.4%로 급격하게 상승했다고 밝혔다.

군국주의 일본은 자원 수탈을 위해 여러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폭력적인 시행과정으로 효과적인 자원통제를 넘어 군비 확장의 재원까지 마련했다. 조선 후기 유교 사회의 뿌리 깊은 제사문화는 함경도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집안마다 다양한 가양주((家釀酒) 전통을 만들었으며 대부분 쌀이 제사상에 올리는 술의 주원료였다.

조선총독부의 확고한 목표 아래 주세령이 시행됐으나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가양주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30년 통계를 보면 형사재판 사례에서 절도 5267명, 사기 1295, 주세령 위반 6911명으로 절도와 사기를 더한 숫자보다 속칭 밀주(密酒) 처지로 내몰린 가양주 단속이 많았다.

특히나 주세령 위반을 단속하는 과정은 매우 가혹해서 원성이 높았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주세령 시행 결과 조선의 가양주 전통문화는 위축돼 사라졌고, 현대 일본의 사케는 700 역사를 자랑하는 관광상품으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생산된 쌀은 1920년 175만석, 1924년 472만석, 1928년 740만석 규모의 기하급수적 증가추세로 일본에 반출됐다. 쌀이 주식인 조선과 일본에서 쌀 수요를 대체하기 위해 선택된 식품 중에서도 빵은 군대 건빵납품 등 대규모 생산체제 확립 필요성까지 더해져 조선총독부의 정책적 지원과 강압적 수단을 등에 업고 조선의 중요한 대체식량으로 부상했다.

이처럼 아궁이를 사용하던 쌀 문화권에서 화덕에 빵을 굽는 이질적인 식문화가 정착되는 과정은 현재 우리가 먹고 싶어 빵집이나 마트에서 가볍게 집은 빵과는 다르게 무력으로 지배되던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배경과 군사적, 산업적 이해가 자리했다.

동요 ‘낮에 나온 반달’로 널리 알려진 윤석중의 1929년 ‘허수아비야’는 고향에서 쫓겨나고 쌀을 빼앗긴 조선의 정서를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허수아비야 허수아비야
여기 쌓였던 곡식을 누가 다 날라가디?
순이 아버지, 순이 아저씨, 순이 오빠들이
온 여름 내 그 애를 써 만든 곡식을
가져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누가 다 날라가디?
그리고 저, 순이네 식구들이
간밤에 울며 어떤 길로 가디?
-이 길은 간도 가는 길
-저 길은 오사카 가는 길
허수아비야 허수아비야
넌 다 알 텐데 왜 말이 없니?
넌 다 알 텐데 왜 말이 없니?

* 김다언 작가는 치과의사이자 ‘꿈베이커리’ 이사이다. 저서로 ‘목마와 숙녀, 그리고 박인환’ ‘박인환, 미스터 모의 생과 사’ ‘박인환,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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