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⑥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술빵은 밀가루 반죽에 술 생산과정 부산물인 술지게미를 활용 발효시킨 뒤 쪄서 만든 빵이다. 우리 전통 식문화인 떡 중에서 소위 ‘술떡’이라고 불리는 증편이 있어 방법적인 면에서 술빵이 이색적인 음식은 아니다.

그러나 서양에서 보면 아궁이에 쪄서 만든 빵이기에 화덕에서 구운 빵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효모를 사용한 맥주 생산지 옆에 빵 공장을 두고 술, 밀가루 반죽 발효와 생산과정을 효율화했으므로 술을 사용했다고 특별할 일은 없다.

술빵에서 서양과 큰 차이는 화덕에 굽지 않고 쪄서 만드는 방식에 더해 설탕을 많이 사용했으면서도 밥처럼 식사 목적인 점이다. 엉뚱한 소리로 들릴 수 있겠지만 프랑스 빵 바게트는 법으로 물, 밀가루, 소금, 이스트 외에 어떤 재료도 사용할 수 없게 규정했다.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밥을 지을 때 꿀물이나 설탕을 넣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보면 된다. 물론 한국 법률에 ‘밥 짓는 법’ 조항은 없으나 가정에서 밥 짓는 우리 문화와 화덕을 개별 가정마다 둘 수 없어서 빵집에서 사야만 했던 서양의 식문화 발달과정 차이를 알면 이해가 된다.

술빵 출발 역시 대용식 개념

1935년 12월 12일 동아일보 기사 ‘요새 식빵은 웨 맛이 없나?’.
1935년 12월 12일 동아일보 기사 ‘요새 식빵은 웨 맛이 없나?’.

전편에서 소개한 ‘애국빵’은 잡곡에 흑설탕을 넣어 만든다고 소개했다. 당시 독일에서 흑빵이 처음엔 거부감이 있었으나 지금은 도리어 잘 먹는다는 1940년 기사를 보더라도 빵이 대용식으로써 밥과 비교되는 ‘맛’의 문제는 일본 당국자들의 큰 고민이었다.

‘애국빵’처럼 술빵 역시 출발은 대용식 개념이었고 처음부터 호응이 있지는 못해 긴 시간에 걸쳐 정착된 음식이다.

먼저 1935년 12월 12일 동아일보 기사 ‘요새 식빵은 웨 맛이 없나?’를 보자. 식빵은 서양음식으로 캐나다, 호주산 밀을 사용했으나 요즘은 좋은 밀을 전혀 구할 수 없어서 빵 품질이 달라졌다는 내용이다.

1930~40년대는 대공황, 전쟁 등으로 곡물 가격이나 수요가 급변하던 시대였으며 세계적으로도 식량 공급이 안정적이지 못했으며 대체로 부족했다. 1930년대 중일전쟁까지 치르던 일본으로 쌀이 반출되면 부족한 곡물은 중국, 만주밀 등으로 채워졌는데 우리밀을 포함해서 이들은 글루텐 함량이 낮아 제빵에 적합한 밀은 아니었다.

일본은 쌀을 수탈하더라도 관리지역이던 식민지 백성 역시 먹고살아야 했다. 밥과 비교해 훨씬 떨어지는 식감과 맛을 가진 ‘잡곡팡’을 대용식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설탕은 꼭 필요했으며 이런 배경 등으로 1920~30년대 설탕 소비는 급증했다.(사진첨부)

잡곡팡 만드는 법이 담긴 1920년대 신문기사.
잡곡팡 만드는 법이 담긴 1920년대 신문기사.

1920년대 초반부터 이미 각종 신문과 잡지는 빵 종류와 다양한 제빵 기사를 내보냈고 대용식 문화를 확대했지만 큰 문제가 있었다. 당시 문맹률은 80% 정도로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신문, 잡지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파급력에 한계가 있었다.

1939년 12월 잡지 ‘農民生活(농민생활)’에는 ‘필수의 대용식품: 팡 만드는 법(방신영)’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는 ‘찌는 떡’ 재료와 만드는 법을 상세히 소개하는데 내용은 밀가루 반죽에 베이킹파우더를 사용 부풀린 후 시금치나 콩, 호박, 감자 등을 고명으로 사용 둥그렇게 만들어 찌는 즉, 현대 술빵의 원형을 재료별로 소개했다.

사진의 ‘잡곡팡’도 3종류의 찌는 떡과 함께 소개된 메뉴였다. 만드는 방법에서 공통적인 특징 하나는 설탕을 큰사시를 이용하라고 지시한다. 큰 숟가락에 설탕을 수북하게 뜨고 특히 ‘잡곡팡’은 네 번으로 많이 사용하라는 뜻이다.

전통적인 방식의 찹쌀로 만든 떡은 설탕을 넣지 않아도 단맛이 있다. 밀가루나 잡곡을 사용해서 전통적인 밥과 떡을 넘어서기 어려워 설탕의 힘을 빌려서 쌀을 대체하는 효과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베이킹가루를 사용 즉, 만드는 방식을 보면 빵인데 떡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농민 계몽을 통해 쌀 소비를 대체할 목적으로 익숙한 개념을 도입했다는 생각이다.

일제시대 일본이 대체식을 칼로리 높은 영양식으로 홍보

일본이 신문 잡지에서 대체식을 칼로리가 높은 영양식이라는 과학적 근거를 대며 홍보했기에 열량이 높은 설탕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당시 캐러멜 광고를 보면 칼로리가 높다는 점을 부각, 마치 건강식처럼 홍보하던 시절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다양한 매체를 사용했으나 커다란 장벽 중 하나가 높은 문맹률이었기 때문에 농촌은 직접적인 대민 접촉이 필수적이었다.

조선총독부 지배력은 농촌지역까지 구석구석 미쳤으며 효율성을 위해 그들은 군국주의 일본 본토의 기본정책에도 융통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1940년대는 조선어 말살정책에 기반해 모든 기관과 일상에서 국어(일본어) 사용을 강요하고 조선어 사용을 엄격하게 통제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1943년 문맹률이라는 현실 문제 앞에서 조선어 영화를 제작한 당위성을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징병제도라는 특수 사항은 극히 민도가 낮은 말단까지 매우 급속하게 퍼져야 합니다. 이에 관련해서, 예를 들면 징병제도는 어떤 것인지 수속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수단으로 조선어를 사용하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오히려 조선어로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에서 특별히 한쪽에서는 국어영화를 만들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조선어로 만드는 영화들이 실제적으로 제작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좌담회: 조선영화의 특수성’에서 조선총독부 영화검열실의 이케다 구니오가 말한 내용이다. 조선총독부의 농촌 통제는 매우 체계적이었으므로 쌀 반출로 인한 식량 공백은 밀가루와 잡곡으로 대체됐고 그에 맞는 식문화가 보급됐다.

설탕의 단맛은 쌀과 대체식의 간격을 메우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으며 칼로리 높은 좋은 식단이라는 과학적 근거까지 만들었다. 이는 서양의 주식인 빵의 발달과정에 비교하면 간식이나 군것질 형태의 음식이다.

신문기사서 빵 제조 시 베이킹가루 대신 술 넣으라고 바뀌어

조선의 빵 대중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후방산업인 제분과 제당산업 변화는 차후에 다루도록 하겠다. 술빵으로 돌아와서, 조선총독부가 술을 사용한 빵을 홍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앞서 주세령에서 설명했다.

그들은 부득이하게 농촌에서 빵 대신 떡이라는 친근한 명칭을 사용했으나 재료 중 베이킹가루라는 낯설고 어려운 개념의 용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전통문화인 가양주는 ‘밀주( 密酒)’라는 이름으로 매우 강한 처벌을 받았다.(사진)

매일신보 1942년 10월 6일 ‘밀주자 엄벌’ 기사.
매일신보 1942년 10월 6일 ‘밀주자 엄벌’ 기사.

당시 이천세무서는 1941년 2월 1일부터 2월 28일까지 밀주업자 단속을 시행 22건을 적발했는데 음식업은 1건이고 나머지는 모두 농가였다는 기사가 있다. 일제강점기 주세령으로 통제됐던 가양주는 해방과 함께 잠시나마 부활의 시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신문 기사는 빵 제조에서 베이킹가루가 아니라 술을 넣으라는 내용으로 바뀌게 된다. 농촌 인구가 대다수였던 시절 베이킹가루 사용보다 훨씬 효과적인 빵 제조법에 일본의 주세령 족쇄가 풀렸기 때문이다.

일본이 물러나고 미군정이 들어섰어도 여전히 쌀은 주민들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빵 만들기에 적합한 서양의 밀가루가 배급됐다는 점이 술빵 확산의 변곡점이 된다. 당시 쌀 부족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였으나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미군정기 보급된 밀가루는 일제강점기 만주밀 등에 비해 먹음직스럽게 부풀어 오르는 훌륭한 빵을 만들 수 있었고 설탕과 대체품인 사카린의 보급은 술빵이 대용식으로 남한 지역에서 널리 보급되는 과정에 큰 몫을 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되고 6.25를 거치면서 밥을 마음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팠던 긴 역사의 우여곡절 속에서 토착화된 술빵이지만 지금은 추억이 담긴 음식 중 하나이다.

쌀 소비가 줄고 베이커리 카페가 대중화된 지금 설탕 함량이 많은 빵을 자연스럽게 인식 소비하는 현상은 빵을 주고 쌀을 가져가려는 강압적 힘이 작용했다는 시대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잃어버린 가양주 문화가 조금씩 살아나는 요즘 술빵도 이와 어우러져 새로운 시대에 발맞춰 나가는 전통음식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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