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③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 조선 후기 빵과 포도주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던 천주교는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순교를 두려워 않은 신자와 사제가 많았기에 한반도내 빵 제조는 생각보다 오래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더라도 대한제국 이전 조선 말기 빵에 익숙하지 않던 시기 떡이나 만두 등과 경쟁하는 제빵소를 만들어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록상으론 1894년 제물포에서 빵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인을 주로 상대했던 조선 최초의 대불호텔 간판에 MEAT & BREAD 가 있었다.(‘개화기 한국 커피역사 이야기’ 77쪽)

1894년 독일잡지에 KOREA 특집기사와 사진이 실렸는데 사진 속에 대불호텔 간판이 있고 희미하게 HOTEL, BREAD 글자가 보인다.(사진첨부)

자료사진 Deutsche Illustrirte Zeitung 1894 대불호텔 간판을 부분 확대 처리한 사진.
자료사진 Deutsche Illustrirte Zeitung 1894 대불호텔 간판을 부분 확대 처리한 사진.

당시 인천을 기록한 ‘인천사정(仁川事情)’(오가와 유조)에는 대불호텔 음식 종류와 가격도 상세하게 있는데, 대불호텔 메뉴(1892년)에 서양요리 1인분 상 1원 50전, 중 1원, 하 75전으로 연회요리 상 1원(1인분, 중 75전)에 비하면 훨씬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인천항에는 하역노동자와 짐꾼이 많았기 때문인지 짐꾼 하루품 (50전), 목수 하루품(70전), 조선인 인부(23전) 등의 기록도 있어 음식값의 상대적 비교가 가능하다. 1901년 일본 영사관 보고를 보면 대불호텔의 상업활동 폭을 짐작할 내용이 있다.

영사관에서 탐문한 바에 의하면, 英國 군함 바르파로부터 5, 6일간의 기한으로 陸戰隊 150명을 入京시킬 예정으로 그 식량을 大佛호텔에 주문했다는 것임. 이상 유념하기 바라 전보함.

당시 일본 영사관 보고로 보아 대불호텔은 많은 인원의 식사를 동시에 준비할 수 있었으며 서양인의 식단에 특화됐음을 알 수 있다. 대불호텔에는 서양인만 투숙했던 것이 아니라 윤치호의 기록 등을 살피면 조선인 주요인사 이용 또한 많았음이 확인된다.

1892년 메뉴 기록을 보더라도 최소한 그 이전부터 빵을 먹을 수 있었다고 보이지만 빵은 값비싼 서양식단을 주문했을 때 먹을 수 있었을 것이고 빵만 따로 판매하는 독립적 베이커리 매장이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1890년대 일본의 빵 식문화를 보면 긴자 점포에서 30분 넘게 줄을 서야 먹을 수 있었다던 단팥빵 가격은 1개에 1전으로 하루 매상이 일천엔에 도달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오카다 데쓰, 일본 식문화 작가)

전편에서 언급한 지리학자 버드 비숍은 1894년 부산항에 발을 내디디며 만나게 되는 것은 Korea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특이한 인상을 기록했다.

그녀는 부산을 여행하고 다시 배편으로 부산항을 떠나 3일 후 제물포에 도착했다. 배로 도착한 인천항에서도 영국 세관원이 갑판으로 올라와 절차를 진행, 일본인 사무관이 선장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했으며 제물포의 인상은 바닷가 모서리를 따라 뿔뿔이 흩어져 있는 초라한 집들의 분위기로 기록했다.

아쉽게도 그녀의 숙소는 대불호텔이 아니라 중국인이 운영하는 ‘스튜어드 호텔’에 묵었다고 밝혔는데 아마도 1984년이 외세의 관심뿐 아니라 격동의 시기였던 만큼 오가는 외국인이 많아 대불호텔 객실에 여유가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버드 비숍의 기록에 보이는 현재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의 당시 모습

현재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으로 널리 알려진 청국조계와 일본조계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녀의 기록을 보자.

중국인 거주지는 수려한 관아와 길드, 공회당, 건실히 번창하는 상점들로 이어지고 있는데, 계속되는 폭죽 소리와 징과 북을 두드리는 소리로 분주하고 시끄러워 보였다. 확실히 무역에서는 중국인들이 일본인을 앞지르고 있었다.

일본인 거주지는 훨씬 더 인구가 많고 넓었으며 과시적인 데가 있었다. 그들의 총영사관은 사절단을 위압하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그곳의 작은 상점들은 주로 자국인들의 필요를 충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어서 버드 비숍은 “Korea의 제물포는 어디에 있느냐고 의아할 것이지만 그들의 비중은 작고 일본인 거주지가 서울로 가는 주요 길목 대부분을 차지하고 조선의 마을은 그 바깥에 위치하며 더러운 샛길을 지나 작은 토막이 들어찬 곳”으로 표현했다.

또한 버드 비숍은 한강 수로를 따라 여행하며 자세한 관찰력과 깊은 통찰로 조선 평민의 삶과 관아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들은 게을러 보인다. 나는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노동으로 획득한 재산이 전혀 보호되지 않는 체제에 살기 때문이다.

관아 안에는 Korea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기생충들이 우글거렸다. 거기엔 조잡한 면직 제복을 입은 군인과 포졸들, 문필가들, 부정한 관리들...

지리학자인 버드 비숍은 제물포와 한강을 오가는 배편 상황이라거나 지리적인 형태에 더해 빨래터 아낙들의 분주함, 고기 1.2㎏을 먹은 후 다른 음식을 또 먹지만 비만이 아닌 평민 모습, 밥을 담는 그릇의 크기와 숟가락 재질 등 세세한 묘사를 기록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기록을 남겼다.

버드 비숍이 여행에 불편한 상황을 피하지 않고 학자적 자세로 열정과 땀으로 만든 기록을 읽은 김수영 시인은 시 ‘거대한 뿌리’에서 가혹한 삶을 견딘 백성과 이들에 군림했던 관리와 외세 등을 나열하며 격렬한 감정을 표현했다.

김수영이 책을 읽던 시기는 번역본이 나오기 이전으로 시에서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표현을 사용했을 정도이니 원서를 긴 시간에 걸쳐 읽어가면서 깊은 감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버드 비숍의 기록을 읽는 일은 독자에 따라 다소 지루할 수도 있으나 내용을 모르고서는 ‘거대한 뿌리’를 쓴 시인의 마음에 다가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대일보 1912. 12. 24
시대일보 1912. 12. 24

청국, 일본인의 거주지 바깥 초라한 곳에 조선인 거주지가 있었다는 버드 비숍의 설명처럼 대불호텔은 빵을 제조했으나 소비층은 국적과 신분에 따른 제한이 있었으며 가격 또한 접근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대중적 빵집은 좀 더 기다려야 했다.

대불호텔은 인천항의 지리적 특성이자 수입에 유리한 조건에서 일본 직수입으로 적합한 밀과 제빵사를 고용해 비싼 음식 가격만큼 서구인의 입맛에 근접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1912년 12월 24일 시대일보는 전기를 사용한 밀가루 제조소를 인천부내 면외동에 설치했다는 기사를 냈다.

우리나라는 1900년 4월 10일 종로에 최초 가로등 등장을 기념해 ‘전기의 날’로 기념하고 있으므로 한반도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대규모 공장이 들어설 수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1912년 인천에 만들어진 전기를 동력으로 사용한 제분공장 기사는 빵의 대중화를 앞당길 제분산업이 이제야 발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 김다언 작가는 치과의사이자 ‘꿈베이커리’ 이사이다. 저서로 ‘목마와 숙녀, 그리고 박인환’ ‘박인환, 미스터 모의 생과 사’ ‘박인환,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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