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번외편 ①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EBS 드라마 ‘명동백작’(2004년 24부작)은 이봉구 에세이를 바탕으로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

명동백작이라 불렸던 이봉구는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식민과 전쟁으로 점철된 1930~60년대 서울 명동과 종로 거리에 문화와 예술의 숨결을 불어 술집, 다방 주변 이야기를 정감있게 그려낸 작가이다.

영화 밀정에 담긴 카카듀
영화 밀정에 담긴 카카듀

영화 ‘밀정’을 보며 카페 카카듀에 시선이 머문 사람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사진) 이봉구는 ‘한국최초의 다방:<카카듀>에서 <에리자>까지’(1964년)라는 수필과 ‘명동 비 내리다’(1978년)에서 카카듀에 대한 개인적 체험과 이후 서울의 다방 변천사를 기록했다.

관훈동 초입 3층 벽돌집 아래층에 영화감독 이경손씨가 하와이에선가 온 묘령여인妙齡女人과 더불어 경영하던 <카카듀>다.....

봉산탈춤의 가면을 걸어놓고 간판 대신에 붉은 칠한 박아지 세쪽을 달아놓아 한때 서울거리에 이채를 띠었다.

그러나 경영經營에 능치 못한 이李씨이고 다객茶客도 그리 흔치 못한때라 불과 수개월에 문을 닫고 이李씨는 상해로 가고 그 문제의 꽃 같은 여주인女主人의 행방도 알 길이 없었다.

이봉구는 일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다방이 일찍부터 존재했으나 우리 사람의 손으로 만든 최초의 다방을 카카듀라 기록하고 이후 멕시코, 낙랑파라 등의 주인과 분위기도 차례로 언급했다.

위에서 말한 이경손 감독과 공동경영자로 하와이에서 온 여인은 현앨리스이다.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를 보면, 현앨리스는 1903년 2월 인천에서 하와이로 떠난 2차 이민 배에 오른 현순 목사의 딸이다.

현순은 하와이에서 통역 일을 맡는 와중에 목사가 됐으며 이후 상해 임시정부 일을 돕게 된다. 자연스럽게 현앨리스도 상해임시정부 청년활동을 했으며 이경손과는 먼 친척관계로 카카듀는 독립운동의 활동 폭을 넓히는 장소였을 것이다.

신문에 실린 카카듀의 문화행사.
신문에 실린 카카듀의 문화행사.

현앨리스의 활동을 알 수는 없으나 카카듀를 통해 공식적인 문화행사가 기획됐고 신문에서도 확인된다.(사진, 1928년 9월 5일, 13일 기사)

앞서 소개한 명치제과에서 운영한 3층 건물의 카페보다 규모는 작으나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일찍부터 제공한 조선인 최초 카페가 카카듀이다.

사촌 형을 따라 안성에서 서울 구경을 왔던 열세 살 이봉구는 카카듀에서 영화감독 이경손을 만나 이경손과 영화도 보고 그가 사준 과일 봉지도 받아들었다.

이봉구가 영화에 빠져 이경손이 만든 영화 춘희椿姬를 보고 싶다고 했지만 다른 영화를 보여주고 어린 이봉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공부도 하라고 다독였다는 것이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도 각색된 ‘춘희椿姬’는 창녀가 등장하는 연인 간의 사랑이 소재인데 어린 이봉구가 이불 속에서 먼저 읽고 영화를 보고 싶다니 이경손 감독이 웃으면서 다른 영화를 보여줬다는 일화이다.

상해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관여한 현앨리스는 미국 시민권자 신분이라 일경의 압박에서 비교적 자유롭지만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 이경손 감독은 상해로 몸을 피한 것인데, 상해에서 이경손이 머문 곳은 김훈 작가의 부친이자 임시정부에서 청년활동을 하면서 작가로 활약한 김광주 선생(1910~1973년)의 자취방이었다.

청년 김광주는 상해를 가기 전 다방 멕시코를 출입했다는 기록을 남겼고, 상해 임시정부 사람의 주선으로 이경손과 자취방에서 1년 정도 같이 생활했으며 이경손은 영화 ‘양자강揚子江’ 만드는 일을 돕다가 홀연히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김광주의 기록으로 보면 이경손은 1931년경 상해에 갔을 것으로 판단되며 다방 멕시코 역시 무대의상 사진전(매일신보 1931년 11월 20일)이 열리는 등 다채로운 문화 활동이 함께 했다.

이봉구는 1978년 기록에 이경손 감독이 태국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고국으로 돌아와 영화계를 위해 일하면 좋겠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현앨리스는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해방 후 미군정장교 신분으로 고국에 왔다.

현앨리스는 민간통신을 검열하는 미군속 장교로 왔지만 예상치 못한 분단국가에서 상해임시정부 박헌영과 교분은 그녀의 운명을 비극으로 치닫게 했다.

김광주는 해방 후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서울에 왔고 경향신문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며 김구 선생을 보좌했다. 이봉구와 김광주는 서울에서 작가와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인천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시집을 낸 조병화 시인을 포함 박인환, 김수영, 김경린 등 신진 문인을 지원했다.

특히 김광주는 경향신문 문화면에 조병화의 시를 5회, 박인환의 시를 3회 게재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인연으로 조병화는 수필 ‘김광주씨와 그 주변’에서 김광주의 호방한 성품을 그려내고 인생에 배움이 많았던 분이라며 그리움을 표현했다.

특히 박인환 시인은 경향신문에 함께 근무하며 사르트르의 작품 ‘붉은 장갑’을 김광주와 피난지 부산에서 ‘뿔건장갑’이라는 제목으로 성황리 공연을 올리는 등 인연이 각별했다.

6.25 전쟁으로 피난 시절 부산에서는 변변한 사무실을 가질 수 없던 문화예술인에게 전화기가 있던 다방은 사무실이자 새로운 정보의 창구였다. 이봉구 등도 다방이 아지트였는데 문학과 예술적 방향성에 따라서 모이는 다방과 술집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박인환은 경향신문 근무 전 자유신문 유엔 출입기자였는데 갑자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다. 김구 암살 사건발표가 있기 전 유엔 출입기자단 5명이 체포됐고 그중 한 명이었다.

자유신문 1949년 7월 5일자에 실린 김구 암살 관련 기사.
자유신문 1949년 7월 5일자에 실린 김구 암살 관련 기사.

김구 암살 이후 나빠진 민심에 언론통제가 강화된 것이다. 자유신문 1949년 7월 5일 기사(사진) ‘김구 암살로 표시된 심각한 저류’는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로,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이승만 정권에게 서방 언론과 자유로운 의사소통 창구인 유엔 출입기자단은 위험한 눈앞의 가시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서구사회에 유행한 이유는 나치협력자 문제가 대두됐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사르트르 실존철학의 핵심은 나치 문제를 처리하는 중요한 가치 기준이 된 것이다.

박인환, 김수영 등 신시론 동인은 사르트르 실존철학을 바탕으로 해방된 조국과 문단에 새바람이 불기를 원했고 김광주와 이봉구는 이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친일파는 막강했고 문단과 나라는 이들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박인환은 상해 임시정부가 정통을 인정받지 못한 채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으며 나라의 주권이 우리의 손에 있지 않았던 상황을 홍콩, 상해, 인천항 모습과 교차시켜 시로 만들었다.

사진잡지에서 본 향항香港 야경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중일전쟁 때
상해부두를 슬퍼했다

서울에서 30킬로를 떨어진 땅에
모든 해안선과 공통된
인천항이 있다

가난한 조선의 인상을
여실히 말하든 인천항구에는
상관(商官)도 없고
영사관(領事官)도 없다.
......

해외에서 동포들이 고국을 찾아들 때
그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
인천 항구이다
.......

밤이 가까울수록
성조기가 펄럭이는 숙사와
주둔소의 네온사인은 붉고
정크의 불빛은 푸르며
마치 유니언잭이 날리던
식민지 향항의 야경을 닮아 간다

‘인천항’(1947년) 부분

시대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참여적 시를 쓰던 박인환은 1949년 7월 16일 체포돼 고문을 당했고 이후 그의 시는 급격히 우울해지게 된다. 해방 후 많은 문인이 이름을 올렸던 문학가동맹을 구실로 박인환과 이봉구는 신문에 성명서를 내고 보도연맹에 가입, 활동하게 된다.

이들과 친했던 조병화는 전쟁 중 청년단에 고초를 겪었고 점차 거리를 두며 모윤숙, 서정주 등과 가깝게 지낸다. 명동백작 이봉구가 쓴 명동의 술집과 다방의 이야기는 문학과 예술이 권력에 가위눌리는 상황에서 점차 상업성만 남고 자유가 본질인 문화예술에 위기가 온 상황을 바닥에 깔고 있다.

이봉구가 일제강점기 6개월여 감옥 생활을 했고 해방 후 언론사 기자로 일하다가 40일가량 물고문 등 고초를 겪은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의 글은 때로 침묵으로 말하고 분위기로 설명을 마치는 내용이 많아 사람들에 인용될 때 낭만적 분위기에 젖어 술집과 다방을 돌던 문인으로만 느껴지기도 했다.

이봉구가 1930년대 이육사와 같이 다닌 술집과 다방을 기록하고 1940~60년대 서울 거리를 말하는 이유는 어두운 시대일망정 문학과 예술의 가치인 다양성과 자유가 있는 장소이고, 주인과 객 사이에도 그러한 바탕에서 따스한 정이 흐르던 시간과 사람을 그리워한 때문이다.

인천과 각별한 배우 최불암의 모친이 운영하던 은성을 박인환 등과 단골로 삼았으며 노래 ‘세월이 가면’ 사연을 정감 있게 남긴 ‘명동백작 이봉구’가 그리워진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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