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④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호떡은 중국에서 건너온 음식으로 오랜 역사가 있으나 호빵은 1970년대 출시돼 겨울 국민간식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100년의 이야기가 성립하나? 의문이 생긴 사람이 많을 것이다.

호빵을 처음 먹던 기억을 따라가면 연탄불을 사용한 찜기 안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장면과 삼삼오오 코흘리개 어린이가 모여 놀던 7~80년대 OO상회 간판 아래의 정감 있는 동네가 연상되는 분도 많으리라.

그때는 호빵 찜기에서 나온 연탄재는 눈이 쌓여 빙판을 만든 길 위에 깨트려 부수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 미끄러짐을 막는 유용한 재료로도 사용됐다.

대설예보가 뜨면 염화칼슘이 뿌려지는 21세기 부지런한 대한민국 도로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서 차는 적고 비포장 길 따라 손을 호호 불어가며 걷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던 거리의 정경이었다.

호야호야노 겐마이빵 판매 모습.
호야호야노 겐마이빵 판매 모습.

바로 이 호빵과 비슷한 형태의 겐마이빵(현미빵)이 팔리는 모습은 호빵과 다르게 찜기가 아니라 보온상자 안에서 어른들을 조르던 어린이에 건네졌다.(사진) 사진에 보이는 ‘호야호야노 겐마이빵’은 따끈따끈한 현미빵이라는 뜻이다.

현미빵은 지방에서 경성 같은 대도시로 유학을 온 어려운 여건의 학생이 학비와 생활비에 보태쓰려고 애썼던 지금의 아르바이트와 같은 형태의 판매 품목으로 전국적 유행이었다. 현미빵의 크기는 호빵보다 훨씬 작았으며 빵 가격이 높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빵 판매 수익은 궁색한 살림에 큰 보탬이 됐다.

잡지 ‘어린이’는(1923년 창간) 소파 방정환선생이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었는데 여기에 1926년 ‘야구빵장사’라는 작품이 실렸다. ‘야구빵장사’의 내용은 야구공 모양의 빵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야구를 좋아하는 어린이가 빵 장사로 나선 사연의 이야기다.

빵 장사 주인공은 보통학교 5학년(현재의 초등 5학년) 야구부원으로 소년가장 친구가 교통사고로 입원하자 대신 빵 판매에 나섰고 야구응원가를 부르면서 빵을 판다는 내용으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당시 현미빵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판매됐으나 현재의 일본에서는 겨울철 호빵과 유사한 형태는 판매되지 않고 있다. 사진 왼쪽은 현재 판매가 되는 상품이고 오른쪽의 약간 누런 호빵 또는 찐빵 모습은 옛날식 현미빵을 일본에서 만들어 먹는 사진이다.(사진)

일본의 현미빵 모습.
일본의 현미빵 모습.

그렇다면 당시 생활상에서 호떡과 현미빵이 지금처럼 겨울철 간식의 대표주자로 손꼽혔는지 궁금해진다. 잡지 ‘개벽’ 제39호 1923년 09월 01일 김성(金星)의 글 일부를 소개한다.

평양의 거리는 4年前 보다 퍽 달라젓슴니다. 새로 電車(전차)도 노히고 새 벽돌집도 더러 잇슴니다. 그러나 電車는 外國人의 밥버리통이외다. 번적 번적하는 새 집들도 모다 日人의 것이거나 中國人의 것이외다. 朝鮮人 시가에는 변한 것이 업슴니다. 다만 4年前에는 호떡쟝사가 만터니 지금에는 그것이 하나도 업서지고 거리거리에 「玄米빵」 소래로 가득 채와진 것이 그래도 변햇다면 변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평양은 일본인이 많이 살던 도시로 일찍부터 빵이 판매됐으나 훨씬 전에 청나라 상인들이 활발했던 북방의 문화 경제 중심지로 호떡은 현미빵 이전부터 서민 생활 깊숙이 자리한 음식이었다.

현미빵과 호떡은 5전 단위 언저리에서 판매됐던 것으로 보이지만 양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호떡을 굽는 장면을 묘사한 글을 보면 통상 커다란 무쇠솥 뚜껑 위에 한 장씩 구웠고 크기는 ‘커다란 쟁반’ 크기로 묘사한 기록도 있다.

예전 사람들은 보통 두 끼를 먹었고 고된 일 사이에 먹는 새참이 있었다. 기계보다는 사람의 노동량이 많던 시대라서 한 번의 식사량은 많았고 단순한 군것질이라 하더라도 먹을 수 있는 양이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었을 것이다.

즉 중소도시까지 널리 퍼진 호떡은 훨씬 서민 친화적 음식이었다. 동아일보는 1929년 10월 26일부터 11월 1일까지 6회에 걸쳐 ‘호떡장사 덕성이’라는 제목의 동화를 연재한다.

주인공 덕성이도 ‘야구빵장사’와 비슷한 가정환경의 13살 어린이로 아버지를 잃고 바느질 품을 파는 어머니가 아프게 되자 학교에 가지 못하고 호떡장사로 나선다.

시간적 배경은 추운 겨울인 설날이며 친구들은 설빔을 예쁘게 차려입었지만 추레한 차림의 호떡장사 덕성이는 호떡 판매는커녕 놀림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훗날 멋지게 성장하는 내용이다.

‘호야호야노 겐마이빵’ 판매 사진을 보더라도 겨울철에는 형편에 따라 호떡, 군고구마 등 현대의 겨울철 대표간식(군고구마, 호빵, 호떡, 붕어빵)과 같은 비슷한 선택지가 있었다.

모처럼 얻은 5전짜리 동전을 주머니 속에 쥐고 있는 1920년대 어린이는 신식의 현미빵과 커다란 호떡 사이에서 고민을 반복했을 것이다. 마치 예전보다 붕어빵 개수가 적어지고 호빵 크기가 줄어들자 슬퍼진 현대인의 탄식처럼 당시에도 겨울철 간식은 계절의 즐거움이자 삶의 활력소였다.

현미빵에서 호빵으로 진화돼 100년여를 이어온 호떡과의 겨울철 간식 경쟁을 ‘백년전쟁’이라는 애교스러운 제목을 붙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였고 중일전쟁이 있던 시대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중국의 요동반도를 얻었으나 이에 만족할 수 없었기에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 군국주의는 만주국을 세우기 이전부터 한반도 토지를 수탈 만주 지역 등으로 이주시킨 조선 이주민과 중국인의 갈등을 촉발 전쟁의 도화선을 만들려는 시도가 빈번했고 중국은 수세에 몰려 있었다.

한반도 내에서 일본 상인이 절대강자였지만 조선인과 비교 상대적으로 부유한 위치의 중국 상인들은 식민지 백성들의 원망과 적개심의 분출구로 선택됐고 잡지와 신문 기사는 조선총독부의 속내를 충실히 반영했다.

1925년 04월 01일 ‘개벽’ 58호 ‘형형색색의 경성 학생상’에서 일탈 학생들이 주로 드나드는 장소는 호떡집이고 “호떡장사 淸人(청인)놈들은 학생의 환심을 사고 담배 팔기 위하야 秘密吸煙室(비밀흡연실)까지 준비하야 두고 매일 학생을 유인한다”라는 내용으로 청나라 상인을 싸잡아 매도했다.

신문에는 어린이들의 코묻은 돈을 빼가는 청인 호떡장사라는 내용 등 부정적인 기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심지어 개성에서는 보통학교 여학생이 선생님 심부름으로 호떡집에 갔다 실종됐고 10여 일 뒤에 커다란 궤짝에 여학생을 메고 가던 청인이 붙잡혔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사실이 아니었다는 동아일보 기사(1925.3.17.)도 있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 “동경 부근의 진재(震災)를 이용해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는 등 불령(不逞 : 불평불만이 많아 멋대로 함)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여, 현재 동경 시내에는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다.”는 조작 소문으로 수많은 조선인이 분노한 일본 군중에 의해 학살됐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단순한 풍문 기사로만 읽을 수 없는 시대였다.

호떡에 무슨 죄가 있을까마는 일본은 미개한 조선을 개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침략했듯 호떡장사에도 야심을 투영시키며 중국 진출 명분을 쌓고 있었다. 이러한 ‘가짜뉴스’는 결국 청국 상인들을 수많은 죽음과 행방불명 사건으로 몰아가게 됐으며, 후에 인천의 빵 판매소 한 곳을 소개하는 내용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일본 군국주의 아래에선 조선이나 중국이나 모두 피해자일 수밖에 없고 힘겨운 시기였지만 간식을 마주한 학생들의 모습은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1932년 11월 1일 ‘별건곤’에 실린 ‘학생란’을 보자.

겨울이 차저오면 제일 인상깁흔 것이 호떡이다. 밤에 외출하엿다가 도라오는 길에 호떡을 두어개 사서 신문지에 싸가지고 도라와 이불속에서 먹는 것은 별미다. 극장에 갓다오다가 호떡집으로 뛰여드러가 언손을 녹여가며 군떡을 뜨더먹는 맛, 역시 별미다.

위의 글을 쓴 학생은 지방에서 유학을 왔는데 고향에서 돈이 오면 비싼 요리도 좋지만 값싸고 배부른 호떡을 찾게 된다는 등 재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1920~30년대는 비록 일본을 등에 업은 빵이 위세를 떨치기는 했으나 가격과 양에서 우위를 점한 호떡의 판정승이다.

그러나 1970년대가 되면 삼립식품의 허창성 창업자는 회사의 명운을 뒤바꿀 명작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지금이라면 납치, 노동착취로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엄청난 강수를 둔다.

제빵직원들과 전국을 휩쓸 대작이 나오기 전엔 집에 못 간다는 배수진으로 6개월여 사투 끝에 연탄불 찜기를 사용한 호빵을 내놓게 된다.

과거의 현미빵과 차원을 달리하는 시각적 효과와 손이 뜨겁고 볼이 데는 정도의 오감을 강타한 대작으로 크리스마스 캐럴과 같은 겨울철 상징이 됐다.

당시 호빵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빵을 구하기 위해 업자들은 회사 문전에 장사진을 치고 심지어 가방에 돈을 가득 넣고 회사 담장 너머로 던지며 물량을 받으려고 애썼다는 전설 같은 일화를 남긴 겨울철 ‘국민간식’ 탄생의 순간이었다.

* 김다언 작가는 치과의사이자 ‘꿈베이커리’ 이사이다. 저서로 ‘목마와 숙녀, 그리고 박인환’ ‘박인환, 미스터 모의 생과 사’ ‘박인환,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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