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옛 부두를 찾아서 (3)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도쿄시바우라제작소’ 인천공장

현재 인팡본사물류창고로 사용되는 도쿄시바우라제작소 인천공장.
현재 인팡본사물류창고로 사용되는 도쿄시바우라제작소 인천공장.

화수사거리에서 화수부두로 들어가는 길 입구 양쪽으로 현재 ‘현대두산인프라코어’ 빌딩과 ‘인팡본사물류창고’가 있다. 오른쪽 인팡 창고 앞 보도에는 화수부두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있다.

예전에는 노란색 등대 조형물이 있었는데 친근한 이미지인 돌고래 어미와 새끼 조형물로 장식을 바꿨다. 이 인팡 창고가 있는 곳이 바로 ‘도쿄시바우라제작소(東京芝浦製作所)’ 인천공장이 있던 곳이다.

1938년 화수정(현 화수동) 매립지 위에 설립됐는데 전기 모토 등 전기 관련 용품을 제작하는 회사로 설립 당시는 ‘시바우라제작소’였다.

이 회사는 1875년 도쿄 긴자에서 다나카 히사시게에 의해 다나카제작소(田中製作所)라는 이름으로 설립됐지만, 1893년 미쓰이(三井)재벌에 흡수돼 ‘시바우라제작소’로 사명을 변경한다. 이후 1939년 도쿄전기를 합병해 ‘도쿄시바우라전기(東京芝浦電気)’를 상호로 사용하며 인천공장도 ‘도쿄시바우라제작소’로 이름을 바꾼다.

도쿄시바우라제작소. 인천공장 설립 당시에 지어진 사무동.
도쿄시바우라제작소. 인천공장 설립 당시에 지어진 사무동.

1950년에는 ‘도쿄시바우라(東京芝浦)’를 줄여 ‘도시바’란 상표를 처음으로 사용하다 1979년에는 영문상호를, 1984년에는 일본어 상호를 ‘도시바’로 바꿨다. 도시바는 우리나라에 일반적으로 건전지, 세탁기, 밥솥, TV, 라디오 등 가전제품과 플래시메모리와 노트북 컴퓨터 등으로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우리에게도 친숙한 기업이지만, 한편으론 전범기업으로 지탄을 받고 있다.

이외에도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제조, 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 등의 각종 발전 설비를 제작할 뿐 아니라 일본 철도회사들과 우리나라 지하와 지상 전동차에도 ‘도시바’의 전장품(電裝品, 전기를 동력원으로 하는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도시바’는 기업용 디지털 솔루션 제공,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등 빌딩 시스템 제공, 항공기 관제용이나 기상용 등의 민간용 레이더와 군사용 레이더를 모두 제조하고 있는 거대기업이다.

일제강점기 공장의 운영과 관련해 정확한 내용은 확인 할 수 없으나 생산품목은 산업용 중전기 제품 위주로 생산했다고 한다. 1943년 조선공업협회(朝鮮工業協會)에선 ‘도쿄시바우라제작소’에 숙련공 양성을 위탁하기도 했으며,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에는 군수회사로 지정돼 무기를 제조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적산기업들은 미군정에 귀속돼 15% 정도 불하되고 나머지는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에 인계됐다. ‘도쿄시바우라제작소’ 인천공장은 1956년 정부가 공장을 민영화하며 ‘이천전기’로 바뀐 후 변압기와 전기모터 등을 생산했다. 이후 설비 현대화 등을 거쳐 당시 국내 최대의 모터 생산업체로 자리매김하며 인천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로 성장했다.

그러다 1993년 삼성그룹에 인수되면서 한때 노동자가 1000명을 넘는 등 호황을 유지해 했으나 방만한 경영과 계속된 노사 갈등의 원인으로 수년간 연평균 당기손실 규모가 300억원에 이르렀다.

일진전기 공장. 화수부두 이정표인 노란색 등대 조형물(2005년 촬영)
일진전기 공장. 화수부두 이정표인 노란색 등대 조형물(2005년 촬영)

결국 1998년 6월 금융권으로부터 사형선고에 해당하는 퇴출대상기업으로 판정받아 일진중공업(일진전기)에 매각됐다. 이곳 공장에선 주로 중전기인 변압기와 모터 등을 생산했지만 2014년 충남 홍성으로 공장을 이전한 뒤 한동안 폐공장으로 남아있었다.

텅 빈 공장의 독특한 분위기로 영화, 드라마, 광고, 화보 등의 촬영지로 각광을 받다가 현재는 인팡 본사물류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이 공장 앞으로 예전에는 철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공장 입구 한편에 노란색 2층 건물이 있는데 공장 설립 당시에 지어진 건물로 사무동으로 추정된다. ‘일진전기’ 인천공장은 2017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추진하는 ‘올해의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 후보에 올랐으나 아쉽게도 선정되지는 못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와 만석동, 화수동 일대의 공장 건축물들을 묶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고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날을 기다린다.

‘인간극장, 노인과 바다’ 유동진 씨

‘현대두산인프라코어’빌딩 뒤 3층짜리 건물과 ‘인팡본사물류창고’ 담장 사이의 왕복 2차로 길을 따라 200여m 정도 들어가야 ‘화수부두’가 나오기 때문에 이곳이 초행길인 사람들은 입구에 안내판이 없으면 찾아오기가 힘들다. 부두로 가는 길을 찾기 힘들 경우 동인천역 북광장에서 506번 지선버스(마을버스)를 타면 화수부두까지 쉽게 갈 수 있다.

화수부두에 들어서면 빨갛게 칠을 한 등대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예전에 화수부두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로 썼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화수부두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현대두산인프라코어 건물. 예전에 1층에 새우젓가게와 구멍가게가 있었고 아직도 건물 왼쪽에 새우젓통이 있다.
화수부두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현대두산인프라코어 건물. 예전에 1층에 새우젓가게와 구멍가게가 있었고 아직도 건물 왼쪽에 새우젓통이 있다.
과거 수문통과 배다리까지 이어지는 갯골. 오른쪽 길 위에 창고는 어시장이 섰던 곳이다.
과거 수문통과 배다리까지 이어지는 갯골. 오른쪽 길 위에 창고는 어시장이 섰던 곳이다.

부두 건너편에는 현대제철(과거 인천제철)과 동국제강이 있어 담장을 높게 둘러 부두의 정취는 떨어지지만, 쇠락의 길을 걸어온 화수부두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작년 11월부터 ‘빛의 항구, 화수부두 야간경관 연출 사업’을 추진해 24일 마무리를 했다. 동구가 이 시설을 인수해 5월부터 운영한다고 하니 멋진 야간 경관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으로 기대된다.

등대 오른쪽으로 갯골은 과거 수문통을 거쳐 배다리까지 물길이 이어져 있었다. 이 갯골을 따라 과거 일진전기 공장이 끝나는 곳까지 천막들이 늘어서 창고로 사용되고 있는데, 과거 화수부두가 전성기를 이뤘을 때 어시장이 들어서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2015년 1월에 이곳을 찾았을 때 ‘인간극장, 노인과 바다’에 등장한 유동진씨가 홀로 목선을 건조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때 사진을 찍고 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1년이면 완성될 줄 알았는데 혼자서 배를 건조하느라 거의 5년이란 오랜 시간 끝에 10톤급 목선 ‘선광호’를 만든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목선은 수명이 18년 정도이나 자신은 배 밑을 강화플라스틱과 나무 또 강화플라스틱으로 3겹을 만들고, 바닥에 철판을 덧대어 튼튼하고 안전하게 만들어 120년 정도 수명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인간극장, 노인과 바다’에 등장한 유동진 씨.
‘인간극장, 노인과 바다’에 등장한 유동진 씨.
혼자서 배를 건조하느라 6년이 걸림.
혼자서 배를 건조하느라 6년이 걸림.

이외에도 배의 수명을 길게 하기 위해 바닥에 강화제를 여러 겹으로 발랐다고 했다. 이렇게 자신이 직접 배를 만든 계기는 45년 어부생활을 하며 배를 4척 잃은 경험 때문이라고 했다.

암초에 부딪혀 부서지거나 가라앉은 자신의 어부생활 노하우를 반영해서 직접 설계를 했고 어디에도 없는 자신만의 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3월에 배를 띄우니 꼭 와보라고 했는데 일이 지연돼 12월에 진수식을 진행했다.

2020년에 다시 ‘인간극장 플러스, 노인과 바다 그 후’를 방영했다. 지금은 배를 몰고 한창 조업 중인데 인간극장이 방영된 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사진을 같이 찍자는 사람들도 많단다.

배를 만들며 아파트도 팔고 빚도 많이 졌지만 희망이 있다고 했다. 배를 만들 때 아저씨 사진을 찍으며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우여곡절 끝에 당시에 찍은 사진들을 이동식 하드디스크에서 찾아내 이곳에 당시 사진을 올린다.

‘화수부두’의 형성과 쇠락

화수부두에 정박한 어선들.
화수부두에 정박한 어선들.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일본인의 계속된 유입으로 조계지가 협소해지자 일본거류민들은 지가상승과 개발이익을 예상하고 해안의 매립권 확보에 열을 올렸다. 이에 한국정부는 매립사업이 상당한 수익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원칙적으로 외국인에게 매립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을사늑약(1905)에 의해 1906년 통감부 설치로 일본인의 매립사업은 사실상 아무런 구속이나 통제를 받지 않고 진행됐다.

화수부두가 언제 만들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이 주변은 갯골이 많아 바닥이 평탄한 평저선(平底船)인 목선이 접근하기 좋으며, 자연스레 어업에 종사하는 취락이 형성되며 포구가 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1906년 일본인 이나타 가스히코(稲田勝彦)에 의해 만석동 해안이 매립되고, 이 매립지에 1930년대 후반 조선기계제작소와 도쿄시바우라 인천공장 등이 들어서며 화수동 주변의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때부터 화수부두가 부두의 기능을 제대로 갖췄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전에 화수부두를 ‘나무선창’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이곳으로 가옥용 목재나 땔감으로 쓰이는 소나무, 낙엽송 등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1939년 10월 송현동 해안가에 인천연료주식회사가 설립돼 인천 시내에 장작과 석탄 같은 땔감을 공급하는 시탄시장(柴炭市場)을 인근 화수부두에서 열었다.

이후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 1일에 시내 각 기관장들이 회합을 가지고 화수부두를 수입 양곡과 비료 하역장으로 전용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인천항의 보조부두로 쓰였다.

화도진과 만석·화수부두, 북성포구 일대 항공사진. 50여 척 이상의 배들이 화수부두에 정박해있다.(1947, 인천시 제공)
화도진과 만석·화수부두, 북성포구 일대 항공사진. 50여 척 이상의 배들이 화수부두에 정박해있다.(1947, 인천시 제공)

화수부두가 성세를 이루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에서 60년대 조기잡이 어항으로 역할을 하면서다. 조기파시 때가 되면 많게는 하루에 조기잡이 배 200여척이 들어와 조기를 풀어놨다. 연평도에서 잡은 조기는 물론 멀리 전라남도 흑산도에서도 조기를 싣고 온 배로 부두를 가득 메워 장관을 이뤘다 하는데, 1968년 조기파시가 끝나자 화수부두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1970년대에 화수부두는 수도권 제일의 새우젓 전문시장이자 어항으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명소였다. 그리고 하루에 배 100여척이 몰려와 파시를 열었고, 옹진‧강화‧충청도 앞 바다는 물론 연평‧백령도 근해에서 잡은 생선의 집하부두였다.

특히 김장철이면 동인천에서 부터 화수부두까지 걸어가 새우젓을 사느라 많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고 예전에 여러 사람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배가 몰려들다 보니 선박 관련 상점들도 몰려있었으며, 물이 빠지면 배를 수리하는 일꾼들의 손길이 덩달아 바빠졌다고 한다. 이때 2000여 명이 부두에 모여 살았다고 하니 그 성세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1975년 연안부두 일대 180여만평(595만㎡)을 매립하고, 1981년 10월 19일 연안부두에 ‘인천종합어시장’을 개설하자 대부분의 선박이 새로 생긴 연안부두와 소래포구로 이전해 감으로써 화수부두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안타깝지만 1970년대 수도권 제일의 새우젓 시장이라는 명성은 현재 소래포구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지금도 새우젓을 판매하는 곳이 남아있다.
지금도 새우젓을 판매하는 곳이 남아있다.
달빛기행 안내를 할 때 본 석화를 씻고 담는 작업(2019년 촬영).
달빛기행 안내를 할 때 본 석화를 씻고 담는 작업(2019년 촬영).

※ 화수부두 내용이 다음 편에도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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