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에 저항한 대구 학생들, 4.19 혁명의 마중물이 되다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64년 전인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이승만(1875~1965, 향년 90세) 독재정권에 맞서 학생들이 일어섰다. 4.19혁명의 도화선이자 마중물인 이른바 2.28 대구 민주화 운동(2.28 대구 학생의거)이 일어났다.

2.28 대구 민주화 운동은 3.15 대통령·부통령 선거(1960)를 앞두고 대구시 고등학교 8곳 학생들이 이승만과 집권 여당인 자유당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한 시위다. 이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학생들이 나선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2018년 정부가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2.28 대구 민주화 운동 당시 거리로 나온 대구 학생들 (사진제공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 대구 민주화 운동 당시 거리로 나온 대구 학생들 (사진제공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당시 1960년 한국의 시대적 상황은 참담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발췌개헌(이승만이 자신의 재선을 위해 직선제로 헌법을 고쳐 강압적으로 통과시킨 개헌)과 사사오입개헌(정족수 미달 된 헌법개정안을 통과 시킨 사건)이라는 반헌법이자 불법이고 비민주적인 과정으로 독재 권력을 강화했다.

이승만 독재정권과 그 비호 세력들(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 실시할 예정이었던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1897~1960, 향년 63세)의 당선을 위해 자신들이 권력을 남용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불법 수단을 동원했다.

아울러 정계에서 이승만 독재에 맞설 인물로 국민의 기대를 받던 독립운동가 출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1894~1960, 향년 65세) 선생이 선거를 한 달 앞둔 2월 15일 신병으로 서거했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대통령 당선에 매우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당시 86세 고령이었다. 때문에 대통령 유고시 권력 승계자인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는 것이 자유당 정권 최대의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강력한 야당 부통령 후보이자 현직 부통령이었던 장면(1899~1966, 향년 66세)으로 인해 자유당 이기붕은 당선을 확신할 수 없었다.

2.28 대구 학생의거가 있기 전 대구에서 2월 10일에 장면 부통령 후보의 유세가 예정돼 있었다. 당시 대구는 지금과 달리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진보적인 색채가 강해 이승만과 자유당을 향한 반감이 매우 짙은 곳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이자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장인인 언론이자 독립운동가 출신 박상희는 1946년 대구에서 10.1항쟁을 주도하다가 숨졌는데, 대구는 그런 도시였다. 

1960년 2월 10일 자유당 경북도당은 대구 지역 학생들이 장면 부통령 후보의 유세장에 가지 못하게 하고 야당 후보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대구시내 각 기관장과 각급 학교장을 소집한다.

그리고 자유당 경북도당은 대구 고교 학생들을 일요일인 2.28일에 등교하게 할 것을 지시한다. 일요일 등교 명분은 조기 중간고사,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이었다.

학생들은 일요등교 방침이 알려진 직후부터 학교별 긴급회의 등을 열어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학교에 일요등교를 철회해 줄 것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2월 27일 오후 이대우 경북고등학교 학생부위원장의 집에 경북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경북대사대부속고등학교 학생들이 모였다. 이들은 부당한 일요일 등교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를 조직하기로 하고 결의문을 작성했다.

2월 28일 오후 1시 쯤, 이대우 학생부위원장 등이 학교서 전날 작성한 결의문을 낭독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결의문 낭독은 격앙돼 있던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일제히 궐기했다.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학교를 뛰쳐나와 대구 거리로 나갔다. 그렇게 대구 학생들의 의거로 이승만 독재정권과 그 비호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한 정의의 횃불이 타올랐다.

2.28 대구 민주화 운동에는 학교 8개, 학생 총 1300여명이 참여했다. 그중 학생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시위는 그렇게 경찰들의 강제 해산 명령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로 3.15 부정선거 전까지 서울, 경기, 인천, 부산, 마산 등 국내 각지에서 학생들이 들고 일어서 독재에 항거하며 민주주의를 외쳤다.

2·28 대구 민주화 운동은 단순히 일요일 강제 등교지시로 발생한 것이 아닌, 학생들이 스스로 조직한 자발적인 시위였다.

이는 이승만 독재정권과 자유당의 부정부패를 인식하고 불의에 대항하고자 한 대구 학생들의 자주적 행동이었다.

아울러, 2.28 대구 민주화 운동은 많은 학생에게 민주주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불의에 맞서는 항거 의지를 고양 시켜 1960년 역사적인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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