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 만세'
민족의 뜨거운 외침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05년 전인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하나가 돼 ‘대한 독립 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제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전 우리 민족이 봉기한 항일독립운동이다.

3.1 운동 삽화 (샂빈제공 뉴욕한국문화원)
3.1 운동 삽화 (샂빈제공 뉴욕한국문화원)

독립을 향한 열망이 들끓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일제는 헌병을 동원한 무단 통치(한병 경찰 통치)로 우리 민족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일제의 정치적 탄압을 비롯해 경제적 약탈로 민중의 삶은 악화돼 갔으며, 일제 식민지 지배를 향한 민중의 분노와 저항 의지는 높아져 갔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일제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민족 최고 목표가 됐다.

이러한 시대 흐름 속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 학생들이 일제의 중심부에서 ‘2.8 독립 선언’을 했다. 독립선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은 우리 2000만 겨레를 대표해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여러 나라 앞에 우리가 독립할 것임을 선언하노라.”

일제 경찰들은 독립 선언을 거행한 우리 유학생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탄압했지만, 이 사건은 국내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감동 시켰고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국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의 윌슨(1856~1924, 향년 67세) 대통령이 각 민족은 스스로 정치 조직과 운명을 결정하고 다른 국가나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뜻하는 민족자결주의(1919)를 제창했다.

이는 일제 치하 속 억압과 수탈을 당한 우리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열망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2.8 독립 선언과 민족자결주의 발표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돼 가던 때, 고종(1852~1919, 향년 66세)이 갑자기 승하한다. 고종은 당시 66세로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중병으로 고종이 승하했다는 발표가 있자, 국민들은 의문을 품었다. 이때 마침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삼천만 동포들은 망국의 서러움과 일제를 향한 적개심으로 크게 불타올랐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몇몇 민족지도자와 애국지사들은 민족자결주의 발표, 2.8 독립 선언, 고종의 승하 등 사건이 한데 겹쳐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된 점을 주목했다. 그들은 이때가 한국 민족의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손병희(1861~1922, 향년 61세), 이승훈(1864~1930, 향년 66세), 한용운(1879~1944, 향년 64세) 등 민족지도자들은 기미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등 거족적인 3.1 운동을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그리고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종로구 요릿집)에서 민족 대표 33인(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독립통고서에 서명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3.1 운동을 위해 덕수궁 앞에 모인 민중들 (사진제공 독립기념관)
3.1 운동을 위해 덕수궁 앞에 모인 민중들 (사진제공 독립기념관)

민족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아울러, 탑골공원(서울 종로)에서도 학생과 민중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은 서울, 평양 등 주요 도시에서 시작해 경기도, 황해도, 함경도까지 국내 전체로 확산했다.

이에 더해 3.1 운동은 국외까지 퍼져 만주, 연해주, 일본, 미주(필라델피아) 등지까지 퍼져나갔다.

3.1 운동이 범국민적인 거족적 운동으로 규모가 커지자, 일제는 3.1 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화성 제암리, 천안 아우내, 남원 광한루 등 국내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해 비인륜적인 고문을 서슴치 않았다.

3.1 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진압과정에서 사망자 약 8000명이 발생했으며, 부상자는 약 1만5000명이 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구금자도 약 4만 6000명에 이르렀고 교회 47개소, 민가 715채 등이 일제로 인해 소각됐다.

3.1 운동, 대한민국 출발의 첫걸음

3.1 운동은 각계계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었다.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보다 독립운동이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 더해 3.1 운동으로 일제는 무력 통치에 한계를 느껴 통치 방식의 변화(문화통치, 민족분열통치)를 준다.

국내에선 조직적 독립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1919)된다. 3.1 운동은 중국의 5.4 운동(일제에 대항한 반제국주의 민중운동) 등 다른 나라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3.1 운동은 대한민국 건국의 시초가 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48년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는 3.1 운동을 계기로 수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헌법 전문에서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태극기 (사진제공 픽사베이)
태극기 (사진제공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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