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00년을 지킨 한양도성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628년 전인1396년 2월 26일 조선 창업군주 태조 이성계(1335~1408, 향년 72세)가 수도 한양(지금의 서울)에 도성을 축조했다.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한양도성은 북악산(서울 종로)·낙산(서울 종로·성북구 경계)·남산(서울 중구)·인왕산(서울 종로·서대문구 경계) 능선을 따라 축조했다.

서울 한양도성 모습 (사진제공 서울시)
서울 한양도성 모습 (사진제공 서울시)

한양도성은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했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숭례문(남대문)·숙정문(북대문)이다. 4소문은 혜화문(동문)·소의문(서문)·광희문(남문)·창의문(북문)이다.

한양도성을 처음 축성한 태조 때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석성으로 쌓았다. 이후 세종(1397~1450, 향년 52세) 때 개축하면서 흙으로 쌓은 구간도 석성으로 바꿨다. 세월이 흘러 성벽 일부가 무너지자, 숙종(1661~1720, 향년 58세) 때 대대적으로 보수·개축했다.

성을 쌓을 때는 일부 성돌에 공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태조·세종 때에는 구간명과 함께 담당 군현명 등을 새겼다. 숙종 이후에는 감독관·책임기술자·날짜 등을 명기하여 책임 소재를 밝혔다.

한양도성은 500여년 동안 조선 도읍으로 궁궐, 관청, 종묘·사직과 도성 백성의 보호막으로 나라의 중심지였다. 한양도성은 고대 고구려 평양성과 고려 개성에서 보이는 평지성(평지에 지은 성)과 산성을 융합한 독창적 한국형 도성 제도를 계승한 계획도시였다.

또한, 한양도성은 한국의 수도 서울이 품고 있는 역사유적으로, 현대적인 도시경관과 도시 속의 역사 경관이 조화를 이뤄 600여년 역사 전통을 이어가는 중인 한국의 찬란한 문화유산이다.

일제가 훼손한 우리의 문화유산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왜인들로 인해 옛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1907년 일제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기 위해 숭례문 좌우 성벽을 허물었다.

돈의문과 소의문은 각각 1915년과 1914년에 소실됐다. 돈의문은 전차가 다니는 데 방해된다는 이유였고 소의문은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인근 성곽과 함께 철거됐다.

혜화문은 1928년 관리 보수가 어렵다는 이유로 일제가 문루(건물 아래 출입문을 짓고 그 위에 누각를 지은 것)가 헐렸으며, 1938년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성문과 성벽 일부도 헐렸다.

일제는 1925년 남산 조선신궁과 흥인지문 옆 경성운동장을 지을 때에도 주변 성벽을 헐어버리고 성돌을 석재로 사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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