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으로 치러진 대한제국 초대 국왕의 장례식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05년 전인 1919년 3월 3일 조선 고종(1852~1919, 향년 66세)의 국장이 치러졌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서울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갑작스러운 승하 소식으로, 고종이 일본인·친일파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본식으로 치러진 고종의 국장(사진제공 문화재청)
일본식으로 치러진 고종의 국장(사진제공 문화재청)

이는 망국의 슬픔과 일제의 탄압으로 억눌려 왔던 사람들의 울분을 폭발시켰다. 그렇게 고종의 승하는 3·1 운동이 확산하는 기폭제 역할을 한 사건 중 하나였다.

고종의 국장은 일제(조선총독부)가 주관했다. 국장은 고종이 승하한 지 40일이 3월 3일에 시작했다.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국왕 장례식은 임시기구인 장례도감(장례 주관을 위한 임시기구)이 주관해 관을 왕릉에 안치하고 신주(망자의 혼령이 깃들어 머문다는 나무패)를 종묘에 모시기까지 약 70단계의 복잡한 절차를 3년에 걸쳐 진행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국권을 상실한 망국의 군주 고종의 장례는 불과 40여일 만에 일본의 신도(神道, 일본 토착종교 방식에 의한 사자의례)식 의례로 치러졌다.

기존 선대 왕들은 빈전(왕이나 왕후 승하 5개월 뒤 발인까지 왕 또는 후의 관인 재궁을 두는 전각)에서 제사도 매일 아침, 저녁, 초하루와 보름에 이뤄졌다. 그러나, 고종은 사망 후 10일제, 20일제, 50일제를 지내는 데 그쳤다.

고종의 장례식은 1913년 사망한 일본의 왕족 다케히토친왕의 장례식이 준용됐고, 여기에 조선의 전통적인 관습을 더한다는 원칙이 적용됐다.

아울러,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1841~1909, 68세 사망)의 양자이자, 일본 왕실 장례 총괄자 이토 히로쿠니(1870~1931, 61세 사망)를 고종의 장례 담당자로 초빙했다.

이는 장례를 일본 왕실 방식으로 치르겠다는 일제의 확실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여기에 장례 보좌역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완용(1858~1926, 67세 사망) 등 인사를 고용했다.

고종의 장례는 전대 왕들의 장례에 비해 대부분의 절차를 축소했고 변형했으며, 기간도 대폭 단축하고 말았다. 고종의 국장 행렬은 국권을 잃은 군주의 처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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