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삼전도 바닥에 머리를 박은 인조

인천투데이=현동민│오늘로부터 387년 전인 1637년 2월 24일 소중화를 자칭하던 조선의 왕이 자신들이 오랑캐라 폄하던 청나라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3번 절하며 9번 머리를 땅에 찧었다. 

조선 인조(1595~1649, 향년 53세)는 후금이 국호를 청나라로 바꾸며 병자호란(1636)을 일으키자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떠나고, 45일간 항전하다 결국 항복을 선언한다. 그리고, 패배의 대가는 치욕스러웠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극 중 인조(배우 박해일)가 삼궤구고두례를 하는 장면 (사진제공 영화 남한산성)
영화 남한산성에서 극 중 인조(배우 박해일)가 삼궤구고두례를 하는 장면 (사진제공 영화 남한산성)

조선 인조는 삼전도(현재 서울 송파구)에서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1592~1643, 향년 50세)에게 신하의 나라가 큰 나라를 만났을 때 하는 예법인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를 하는 굴욕을 맛본다.

그렇게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가 되었고 항복의 대가로 배상금과 함께 소현세자(1612~1645, 향년 33세)와 세자빈 강씨(1611~1646, 향년 35세), 봉림대군(훗날 효종, 1619~1659, 향년 39세), 조선 백성 20만명이 청에 인질로 보냈다. 이렇게 삼전도의 굴욕은 1910년 경술국치 이전 한반도 최대 치욕의 역사였다.

무능한 조선 임금이 불러온 치욕의 역사

인조는 나라의 수도를 세 번이나 빼앗기고 도망갔다. 1624년 이괄(1587~1624, 향년 37세)의 난(인조반정 직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느낀 이괄의 반란)으로 반란군에게 수도 한양을 빼앗기고 공주로 피란을 갔었다. 1627년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후금을 피해 강화도로 피란,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남한산성으로 도망쳤다.

인조는 결정적으로 국가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모든 역량이 부족했다. 특히, 인조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적인 외교를 취한 광해군(1575~1641, 향년 66세)과는 달리, 소중화 사상에 빠져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워 조선의 외교 관계를 파탄내고 말았다.

인조는 청나라와 화친할 것인지, 멸국을 각오하고 결사항전 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결정적인 상황일 때마다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저 군주로서의 알량한 자존심만을 내세우면서 신하들 앞에서 목소리만 높였다. 그 결과 차디찬 삼전도 바닥이 인조를 기다릴 뿐이었다.

서인과 인조는 권력 욕심에 눈이 멀어 쿠데타를 일으켜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조일전쟁(임진, 정유 왜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살리는 개혁정치를 펼치던 광해군를 몰아내고 나라에 망조가 들게했다. 심지어 인조는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를 의심해 결국 세자와 세자빈 마저 죽음에 이르게 한다. 못난 임금한테 태어난 명군 세자는 그렇게 스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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