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 소리가 천국에 들리면, 춤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한반도를 넘어 중국까지, 동아시아에 귀감이 된 영웅이자 호걸
'위국헌신 군인본분'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일제 수괴 사살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14년 전인 1910년 2월 14일, 안중근(1879~1910, 향년 30세) 의사가 일제로부터 사형을 선고 받았다.

안중근 의사는 지난 1909년 10월 26일, 대한제국 침략을 주도한 인물인 일본 총리대신이자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68세 사망)를 처단해 살인혐의 피고인 신분으로 일제로부터 사형을 선고 받았다.

안중근 의사 (사진제공 국가보훈부 유튜브 채널 갈무리)
안중근 의사 (사진제공 국가보훈부 유튜브 채널 갈무리)

안 의사는 당시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침략자이자 교전국 수뇌부 인사인 이토 히로부미를 전쟁 중에 사살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안 의사 역시 일제로부터 거사 동기 질문을 받자,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아울러, 안 의사는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 객지에서 죽은 이의 시체를 그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 장사를 지냄)하지 말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게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중국 랴오닝성 다롄시)의 형장에서 순국했다.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 아직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순국을 계기로 항일운동이 확산될 것을 우려해 시신을 돌려주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됐으며, 안 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저격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항하는 살신의 항거였다.

또한,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당시 한반도는 물론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등 동아시아에서 정파와 이념을 뛰어넘는 세기적 의거였다.

중국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1866~1925, 향년 58세)은 안 의사를 위해 발문을 썼고, 당시 중국의 저망한 지식인 장타이옌(1869~1936, 향년 67세)은 안 의사를 “아시아 최고의 의로운 협객(亞洲第一義俠)”이라고 불렀다.

중화인민국공화국 초대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1898~1976, 향년 77세) 역시 “중·일 갑오전쟁(청·일전쟁) 이후 20세기 초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죽임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두 나라 인민의 공동 투쟁이 시작됐다”고  높이 평가했다. 

국민당 장제스(1887~1975, 향년 87세) 총통 또한 안 의사를 기려 “장렬한 뜻이 천년 길이 빛나리(壯烈千秋)”라는 글을 남겼다.

이렇게 안 의사는 한반도 침략의 원흉이자 일제 수괴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함으로써 한반도를 넘어 중국까지, 동아시아에 귀감이 된 영웅이자 호걸이 됐다. 

한편, 안 의사가 사형 선고 항소를 준비하려할 때 안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1862~1927, 향년 65세) 여사는 안 의사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올바른 일을 하다 맞이하는 죽음에 당당하고 떳떳하게 맞서고 그것이 효도”라는 내용이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조 여사는 국가를 위해 희생을 각오한 아들의 다짐을 끝까지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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