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렴주구에 도적 자처한 임꺽정
탐관오리 상대로 의적 활동 펼쳐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462년 전인 1562년 2월 16일 가렴주구(여러 명목의 세금을 가혹하게 억지로 거둬 백성의 재물을 무리하게 빼앗는 일)에 대항한 ‘조선 의적’ 임꺽정(출생 미상~1562)이 관군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다.

임꺽정은 임진왜란 전 조선 전기에 황해도 지역 중심(황해남도 구월산 일대)으로 활동한 백정 출신의 도적이다.

임꺽정의 어록 (사진제공 KBS 역사저널 그날 유튜브 캡쳐)
임꺽정의 어록 (사진제공 KBS 역사저널 그날 유튜브 캡쳐)

임꺽정이 도적이 된 이유는 당시 흉년이 지속돼 농민들의 생계가 빈곤해고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까지 더해져 민초들의 궁핍한 상황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아울러, 당시 왕이었던 명종(1534~1567, 향년 33)이 아직 나이가 어려 그의 어머니인 문정왕후(1501~1565, 향년 65세)가 수렴청정(나이 어린 임금이 즉위했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그를 도와 국사를 돌보는 일)을 했고 이 과정에서 왕실 친인척들의 부정부패가 발생해 나라가 전체적으로 어지러운 시기였다.

혼란의 시기 속 임꺽정은 지방의 탐관오리들을 습격하고 관아의 창고를 털어 빈민에게 나눠주는 면모를 보였다.

이에 백성들은 임꺽정을 의적이라 칭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늘어나 세력이 불었고 황해도뿐만 아니라, 한양까지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다.

조정은 임꺽정을 잡기 위해 관군 등을 파견했지만, 임꺽정은 오히려 관군을 섬멸하는 등 능력이 비범했다.

그런데, 임꺽정은 부하의 배신으로 관군에게 죽는다. 현재 죽었다는 사실 이외 자세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에는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러한 기록을 봤을 때, 당시에도 임꺽정이 도적이 된 이유엔 나라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임꺽정은 이러한 사회에 불만과 변혁의 욕구를 느끼고 들고 일어선 것이다.

또한, 임꺽정의 궐기는 백정출신으로서 불합리한 봉건적 조선 신분제도를 향한 도전이자 시대를 앞서간 계급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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