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탐관오리 조병갑, 민중의 분노를 사다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30년 전인 1894년 2월 15일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고부농민봉기는 당시 고부(전북 정읍시 고부면 일대)군수였던 조병갑(1844~1912, 향년 68)의 가렴주구와 탐학에 격분한 농민들을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 향년 40세)이 규합해 일으킨 농민 혁명이다.

전북 정읍에 위치한 만석보유지비 (사진출처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 홈페이지)
전북 정읍에 위치한 만석보유지비 (사진출처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 홈페이지)

당시 농민군 약 1000명은 고부읍의 3문을 부수고 관아로 쳐들어갔고 이에 놀란 조병갑은 달아났다.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옥을 파괴해 조병갑의 횡포로 억울하게 투옥된 죄인들을 석방하고,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강화했다.

또한, 불법적으로 약탈해 간 수세미(水稅米, 봇물을 이용한 값으로 걷던 곡식)를 농민들에게 반환하고, 가혹한 수세 요구로 민원의 대상이 된 만석보(관개용 보)도 파괴했다.

이후 조정은 수습을 위해 안핵사 이용태(1854~1922, 68세 사망, 친일반민족행위자)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일의 책임을 농민들에게 물었고 격분한 농민군들은 또 다시 봉기해 관군과 전면전을 펼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차 동학농민혁명이다.

고부민란은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됐다는 것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조선 후기 여느 민중 봉기와 비슷한 원인과 과정으로 전개됐지만, 그 지도자와 민중이 일으킨 민중봉기의 경험으로 과거에 비해 한 차원 높은 농민전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데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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