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 세력 색출 과정서 체포돼 사형 선고
백선엽 장군 도움으로 사형 면하고 무기징역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75년 전인 1949년 2월 13일 훗날 유신헌법으로 독재 정치를 펼치는 박정희(1917~1979, 향년 61세) 당시 국방경비대 소령은 남로당 조직책으로 지목 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 종료 후 이승만 정부가 군 내부 남로당(남조선로동당) 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체포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남로당 조직책으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여수·순천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당시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의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이 중심이 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던 제주 4·3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켜, 정부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수와 순천 등 전남 동부에서 군인과 함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제22주년 국군의날 기념행사 참석 연설 모습 (사진제공 대통령 기록관)
박정희 전 대통령 제22주년 국군의날 기념행사 참석 연설 모습 (사진제공 대통령 기록관)

당시 박정희 소령이 사형을 선고받자 국방경비대 내 똬리를 틀고 있는 일본 육군사관학교과 일제가 만주에 수립한 괴뢰국인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출신 친일파 선배와 동기들이 정부에 선처를 호소했다. 

이에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사건 책임자였던 친일파 백선엽(1920~2020, 향년 100세)은 박 소령을 불렀다.

백선엽은 박정희를 향해 “일본 제국주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당신이 왜 사회주의 활동을 하나?”라고 질문한 뒤, “군부 내 사회주의자 명단을 불면 사형은 면할 수 있다”고 회유했다.

그렇게 박정희는 같이 활동했던 남로당 동지들을 밀고했고, 이승만 정부가 추진한 좌익계열 숙군 작업에 도움을 줌으로써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는다.

훗날 북한의 남침으로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발발하자, 박정희는 백선엽에 의해 다시 육군으로 복직되고 소장까지 군 생활을 이어간다. 그 뒤 1961년 육군 2군사령부 부사령관 재임시절 5.16 군사반란을 일으켜 4.19혁명(1960년)으로 탄생한 2공화국 민주 정부를 전복하고 대통령에 취임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항상 시대에 맞춰 권력에 편승한 기회주의자였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할 땐 혈서까지 써가며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만주군관으로 부역했고, 해방 후 친일파들은 설자리가 없게되고 항일운동에 앞장선 사회주의세력이 융성하게 되자 남로당에 가입했다. 그러다 발각되자 동료를 밀고하고 자신은 살아 남았다.

친일파에 의해 목숨을 구한 그는 한국전쟁 이후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돼 자신의 독재체제를 굳건히 했다.

한편, 박 전 대통령의 사형을 면하게 도와준 백선엽은 한국전쟁 때 큰 공을 세우며 북한의 무력에 의한 통일을 저지한 업적이 있지만, 그는 일제강점기 시기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일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유명하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